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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Jan 12. 2022

나이의 프레임과 쿨한 시어머니


“나는 쿨한 시어머니가 되고 싶네요.”

  다른 지역에 논술학원 냈다는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온 이야기였다. 다른 소규모 수업들로 바쁜 A 친구, 바쁜 일정이 끝나 이번 한 주만 겨우 휴식 주간이라는 B 선생님과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무심코 이 문장이 내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유쾌하게 웃으시더니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평소 잘 만나기 힘든 B 선생님, 다른 분들 같으면 정년퇴직을 생각하고 앞으로 노후생활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는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다. B 선생님의 큰 애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둘째도 군대를 마치고 대학원 준비 중이라 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고 계셨다.

 지금껏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은퇴를 한 뒤 전원주택에서 커다란 개를 키우며 농사를 짓는 것만이 앞으로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신랑도 누누이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 그런 전원생활이 마지막 종착지인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래서 매년 한 살 두 살 먹어가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점점 늙어가는 나이의 불안한 프레임 속에 나를 자꾸 가두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B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충격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지금 보고 상상하는 만큼 앞으로의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불안했다. 발전하는 최신 기술 사회에서 더디고 늙어가는 나의 자리는 점점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들과 똑같이,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비슷한 삶의 속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 비슷하게 따라가다 보면 그래도 뒤처지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10대에는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했고, 20대에는 직장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30대에는 결혼하고 출산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0대 때는 거의 비슷한 정답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20대부터는 점점 다른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계속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며 해답을 구해 온 나는 조금씩 나이를 먹을수록 어떤 것이 삶의 정답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느긋하게 노후 생활을 즐길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100세 인생을 준비하며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했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들을 점점 따라가기 버거워지기 시작한데, 사람들의 생활마저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난 항상 선구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사람이었다. 익숙하지 않고 낯선 길을 홀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했지만 스스로 그렇게 할 용기는 없었다. 항상 시대를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강한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엄청난 반발을 받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누군가의 발자국이 지나간 자리에 내 소소한 발자국을 하나 더하며 걸어가면 모든 것이 편안했다. 먼저 인생을 걸어간 선배들의 삶을 바라보며 ‘저렇게 살면 되겠구나’라며 나름대로 나에게 맞는 해답을 찾으면 됐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정답의 이정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 해 두 해가 지날수록 나이를 핑계로 포기하고 회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인지 막연히 늙어가는 세월만 한탄하며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내 미래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딱 이만큼만, 더 도전할 필요도 없고 더 준비할 필요도 없고 그냥 저렇게 노후를 보내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B 선생님의 생각을 달랐다. 나이가 들수록 자리 설 곳이 없고 발전하는 기술들을 따라가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일하라고 말했다. 출가한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쿨하게 식사 대접할 수 있는 엄마가 되면 얼마나 좋겠냐고 덧붙였다. 늙을수록 돈이 최고라며 지금 이 시간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런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Cool한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용돈도 툭툭 던져줄 수 있는 Flex 시어머니. 아마도 엄마의 이런 생각을 들으면 우리 아들들은 화들짝 놀랄 것이다. 아직 결혼은커녕, 하루라도 빨리 대학생이 되어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픈 생각만 가득한 녀석들인데 말이다.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사회가 요구하는 나이의 프레임은 점점 강해진다.

 ‘지금 그 나이에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누구도 대놓고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싱그러운 젊음 앞에 주눅 든 내 마음이,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들이 그렇게 소리 지르는 듯하다. 그래, 점점 삶의 모습들이 다양해지고 있으니, 이제 조금씩 나이의 프레임도 달라지지 않을까? 아직은 기존의 모습으로만 나를 단정 짓지 말자. 실제로 쿨한 시어머니도 가능할 수 있을 거야.


(원고지 1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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