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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바틀비의 조언

by 하늘진주

얼마 전, 기말고사를 끝내고 탱자탱자 놀고 있던 고등학생인 큰 애에게 물었다.

“아들, 누군가가 너에게 어떤 것도 상관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다고 한다면 뭘 갖고 싶니?”

행복? 능력? 즐거움? 사람이라면 좋아할 만한 가치들을 열심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데, 아들이 말했다.

“전, 집이요. 그냥 내 명의의 아파트 한 채가 있으면 걱정 없을 것 같아요.”

집? 아니, 저 말이 한창 꿈과 희망이 넘쳐흘러야 할 고등학생 입에서 나올 말인가? 놀란 마음에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아들의 생각은 확고했다. 집, 돈이 좋다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찬 청사진을 그려나갈 고등학생의 입에서 돈이 좋다고 나온 그 속마음의 이면에는 어른들의 잘못이 클 것이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농업 중심사회에서 공업 중심사회로 바뀌면서 ‘돈’은 우리 사회에서 더욱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사람들이 직업을 고르는 기준도, 아이들이 학과를 고르는 기준도 모두 돈을 잘 버느냐 못 버느냐에 따라 그 선택의 폭이 확연하게 나뉜다. ‘문과’보다는 ‘이과’를 더 선호하고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은 선호하지 않는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돈 잘 버는 인플루언서를 꿈꾸고 어른들은 붉은색, 푸른색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주식 창에 열광한다. 모두 ‘돈’이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우리나라에서 노비제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평가되지만, 2021년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여전히 현대판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듯하다. ‘자본가와 근로자’, ‘소비자와 판매자’, ‘갑과 을’ 등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신분. 이론적으로 이 계급들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 공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평등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도 분명히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부류가 존재한다. 바로 돈이 있는 사람이다.


19세기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은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발하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며 적절하게 일을 분배시키는 나름 괜찮아 보이는 고용주다. 그런 ‘나’가 이루어 놓은 직장의 평화는 최근에 고용했던 필경사 바틀비가 모든 업무에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반발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처음에는 화자 역시 바틀비의 단호한 반항을 이해 못 해 한동안 내버려 둔다. 그의 상식으로, 월급을 받는 고용인이 고용주의 일을 거부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용인인 바틀비는 단순히 일을 안 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안 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힌다. 먹고살기 위해서, 싫든 좋든 자신을 굽히고 일을 해야 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바틀비의 모습은 생경하기만 하다.


직장인들은 ‘남의 돈 벌기 쉽지 않다’라는 말로 자신의 현실 고통을 무마시키려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쉽게 벌 수 있는 ‘눈먼 돈’은 없다. 고용주의 업무 요구에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현실의 바틀비는 거의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는 원래 돈에 구애받지 않는 부유한 사람이거나 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청렴한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용된 입장에서 고용주의 적절한 업무 요구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행운이다.

취업이 힘든 젊은 세대들은 ‘수저 계급론’을 언급하며 개인의 노력보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다. 돈이 돈을 낳고, 혜택이 혜택을 낳는다. 요즘 시끄러운 대권 주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온통 딴 세상 이야기다. 오직 ‘공부’만이 ‘노력’만이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건만, 부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공평’을 애타게 부르짖는 이 세상에서, 그들만의 논리로 무장된 새로운 정의가 존재했다. 안타깝게도 돈을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물려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겉으로는 고용주의 말에 복종하고 속으로나마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소극적인 소신을 가르치는 것, 스트레스 쌓이고 힘들 때마다 “그래, 힘들지? 그래도 어쩌겠니?”라고 맞장구쳐주는 그 정도일까? 21세기 바틀비는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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