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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타다

by 하늘진주

매년 열두 달 중 마지막 달이 되면 연말을 탄다. ‘연말을 탄다’는 것은 계절을 타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다. 일 년 정초, 계획하고 이루지 못한 일들이 12월이 되면 까만 부정적인 감정들이 되어 계속 마음을 짓누른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12월이 되면 자꾸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낸다. 모든 일이 잘 잡히지 않고 홀로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달, 나의 12월이다.


사람의 에너지는 마냥 샘솟지 않는다. 채우고 비우고, 채우고 비우고, 이런 과정 속에서 다시 기운을 얻고 시작할 힘을 얻는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면 지금까지의 본인을 되돌아보고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배터리가 방전된 핸드폰은 각양각색의 충전기에 꼽아 충전하듯이 한해를 달리며 방전된 사람들의 배터리도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진다. 그 충전 방식이 사람들과의 시끌벅적한 만남일 수도 있고 혹은 조용히 혼자 올해를 되돌아보며 다시 내년을 기약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나’와 ‘내’가 만나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바쁜 일상으로 채우지 못했던 결핍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라파엘 프리에의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블리즈 씨에게 생긴 일>에는 내재된 결핍을 채우지 못하고 뜻밖의 일을 당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블리즈 씨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소망하는 것들을 여기저기 집안 곳곳에 흩어놓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매일 주식, 전화, 회사 일에 신경 쓰다 뜻밖의 변신을 경험하는 인물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가 삶에 지쳐 ‘벌레’로 변신한 것처럼, ‘블레즈’ 역시 본인답게 살 수 있는 것으로 변한다. 똑같은 변신이지만 그레고리의 변신과 블레즈의 변화는 완전히 다르다.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한 뒤 가족들의 냉대와 외면으로 비참하게 죽었다면, 블레즈는 제 모습이 바뀐 뒤 자신의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삶을 모두 떨쳐버린다.


매년 12월 연말이 힘든 이유는 정월에 세웠던 계획들이 점점 흐트러지고 올해도 역시 작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마감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올해는 저번과는 다를 거야’라는 희망을 강하게 품어 보지만 ‘역시’라는 초라한 마음으로 씁쓸하게 한 해를 마감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몇십 년에 걸친 기나긴 과정 속에서 형성된 ‘나’란 사람이 정초에 세웠던 굳은 다짐과 결심만으로 완전히 변신하기는 쉽지 않다. ‘또 다른 나’라는 거푸집에 새로운 쇳물과 원료를 넣지 않는 한 획기적인 변신은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새해면 새로운 변신을 꿈꾼다. 연말마다 기운이 방전되고 넘어지더라도 새해는 매번 다시 일어나 좀 더 새로워지고 멋진 나를 꿈꾼다.


한 해가 또 저물어 간다. 어른이 되어 겪는 시간의 맛은 거북하고 씁쓸하다. 아이가 먹는 시간의 요리는 새콤달콤하고 먹을수록 허기지지만, 어른이 되어 맛보는 시간 요리는 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의 주방장은 또 한해를 요리해서 선물한다. 이제는 그만 먹고 싶은데 ‘자꾸 한 입만 더 맛보라’고 숟가락을 내민다. 그 맛이 그 맛이라 정초의 계획 세우기를 멈추고 싶어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섣불리 놓지 못한다. 내년 1월에도 난 포기하지 않고 기존의 계획들을 또다시 나열할 것이다. 새로운 변신과 변화를 꿈꾸며 난 새해를 또 소망할 것이다. 올해 2021년도 많은 흔들림 속에서 나를 붙잡으며 살고 있고, 내년 2022년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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