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된 게으름뱅이는 죽을 각오로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무를 먹었다. 와그작와그작 씹던 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의 머리에 단단히 씌워졌던 소 탈이 훌렁 벗겨져 사람이 되었다. 게으름뱅이는 사람이 된 기적을 채 느끼기도 전에 그립고 그립던 집으로 재빨리 달음박질쳤다. 앞으로 다시는 게으름을 안 피울 것이라 다짐하며. 실제로 그는 평생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며 가족들과 이웃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전래동화 <소가 된 게으른 뱅이>의 한 대목이다. 평생 게으름을 피우며 유유자적하던 게으름뱅이가 한 노인을 만나 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소의 우직함과 성실함을 몸소 체험하며 과거의 자신을 깊이 후회한다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밥을 먹고 바로 누우며 소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아무런 근거 없는 말은 아닌가 보다. 이처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우리의 사회 통념들은 ‘게으름’은 곧 ‘죄악’이라는 묘한 등식 관계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게으름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죄악시되었을까?
저자 이옥순은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 (서해문집)>에서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들에게 근면을 강조하면서부터 게으름은 자연스럽게 죄로 인식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권력자들은 ‘노동자들의 ’ 일하는 시간’을 강조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줄였고,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게으름은 지배권들의 신분과 권력을 과시하고 유지하기 위해, 약자보다는 강자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게으름을 향한 죄의식은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을 줄일 때마다 여실히 드러났다. 처음 주 5일제,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할 때 고용주들은 ‘다른 나라와의 경쟁력’을 근거로 강하게 반발했다. 노동자들 역시 ‘4당 5 락(4시간을 자면 합격하고 5시간을 자면 탈락한다)’ 신화 속에서 입시를 마쳤기에 처음에는 이 제도를 반신반의하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두가 반대하고 걱정했던 게으름은 곧 여유가 되었고,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처럼 장시간의 노동시간에 길들여졌던 한국인들은 조금씩 삶의 여유를 꿈꾸고 또 다른 방향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고 있다. 물론 그 속도는 느리다. 아직은 우리 맘속에 ‘게으름’에 향한 죄의식은 여전히 월등히 강하다. 그 마음은 곧잘 마음의 병으로 나타난다. 주말의 달콤한 게으름은 ‘월요병’이라는 불치병으로, 긴 연휴의 끝자락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힘겹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게으름’과 ‘여유’를 우리 삶에 밀착시켜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고 있다.
이탈리아의 '일 돌체 하르 니엔테(Il dolce far niente.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달콤함)‘ 말처럼 나만의 게으름을 꿈꿔본다. 먼저 눈앞에 푸른 에메랄드빛의 바다가 햇살에 잘근잘근 씹이듯 보이고 머리카락을 살랑거릴만한 시원하지만 습기를 머금지 않은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 부드럽고 가는 하얀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고 부드러운 어쿠스틱 팝송이 은은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초록색 푹신한 빈백과 내 몸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 누워서 읽고 싶었던 책들과 만화책을 가득 쌓아 놓고 싶다. 가끔은 책들을 장식품처럼 다 읽지 못하고 경치에 한 눈을 팔린 채 멍하니 있으며 자연을 눈 안에 담는다. 그러다 생각나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달콤한 티라미스 케이크를 먹고서 허기를 채운다. 밥 달라고 나를 보채는 사람 없이, 숙제했는지 아이들을 확인하지 않으며 편하게 웃으며 담소 나눌 수 있는 그런 곳. 그런 게으름의 장소에 있고프다.
그런 내가 만든 게으름의 장소에서 스르르 빠져나와, 마지막으로 하고픈 이야기는 바로, ’소가 된 게으름뱅이‘의 다른 버전, 복수 담이다. 상상 속의 세계와는 달리 현실은 아름답고 달콤하지만은 않다. 다른 버전은 게으름뱅이가 새사람이 된다는 기존의 아름답고 교훈적인 이야기와 달리, 소를 만들었던 노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노인과 할머니를 소로 만들어 버리고 그 집에 있던 금은보화를 가지고 와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역시 ’점‘을 찍고 복수를 하는 막장 드라마들이 한국 TV 콘텐츠를 오랫동안 점령하며 주부들의 환호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은 유래가 있는 거였다. 그렇지만 그간의 수모를 되갚아 주었던 게으름뱅이와는 달리 우리는 ’게으름‘을 죄악시하며 노동자들을 부려먹었던 권력자들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현명해진 우리들은 물리적인 복수가 최고의 복수가 아님을 안다. 우리는 일상의 시간에 여유의 방점을 찍으며 즐겁게 삶을 즐기면 그만이다. '일 돌체 하르 니엔테’을 즐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