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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Jan 27. 2022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태풍의 눈 속에서

 한 여자가 거울 앞에 서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어색한 지 자꾸 거울에서 눈을 뗀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렇게 거울 앞에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본 적이 없다. 과거 그녀는 화장을 할 때, 혹은 화장을 수정할 때만 거울을 힐끔거리며 자신을 살폈다. 혹 ‘얼굴에 이상한 것이 묻은 것은 아닐까?’,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겠지?’ 오로지 남과의 시선만 의식하며 살아온 그녀다. ‘코로나’라는 검은 그림자가 온 지구를 휩싸인 지금, 그녀는 익숙지 않은 운동 공간에서 처음으로 통 거울 앞에 섰다. 다리 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달라붙은 진남색 레깅스가 어색한 지 펑퍼짐한 티셔츠를 자꾸만 끌어내린다. 이따금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따라 안 올라가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엉거주춤 자세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코로나’ 이전부터 몇십 년 동안 방만하게 생활한 그녀의 온몸 근육들은 자꾸만 ‘뚝뚝’ 소리를 내 지르며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아,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 거지?’

어느새 그녀의 얼굴과 몸은 찝찝한 땀으로 가득 찬다. 그 여자는 이따금씩 몰래 벽에 걸린 시계 초침을 확인하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고대한다.


 얼마 전부터 건강을 위해 필라테스 수업을 신청했다. 물론 그 전에도 아예 운동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열심히 공원을 돌고 스트레칭도 열심히 했다. 코로나 상황이라 다들 힘들지만 나름 열심히 움직이고 서로 위로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차가운 날씨로 만물이 움츠려 들고 칩거하는 겨울, 자연스레 친구들과의 공원 산책을 멈추자 몸과 마음은 알 수 없는 무기력으로 점점 게을러지고 있었다. 2년 남짓한 코로나 팬데믹 생활 동안 내가 얻은 것은 피폐해진 정신과 나날이 불어나는 살들뿐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만나며 소통하는 일이 없어지자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외면했던 갈등들, 불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아온 팬데믹은 각 개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며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았다.


 ‘팬데믹’은 그리스어로 ‘pan’은 ‘모두’, ‘demic’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모든 사람이 감염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여러 번의 팬데믹 선언이 있었다. 특히 중세 유럽 인구 1/3의 생명을 앗아간 흑사병은 많은 문학 작품과 역사에 기록되며 그 비극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데카메론’, ‘페스트’ 등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펜데믹’ 상황 속에서 고통을 겪는 많은 개인들이 묘사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감염병의 비극을 겪지 못한 독자들은 책 속에 묘사된 대규모 감염병 유행의 ‘관찰자’였을 뿐 절실하게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자’는 아니었다. 그동안 여러 번의 ‘팬데믹’이라는 태풍이 지나갔지만 그 비극을 겪지 못한 사람들은 냉정하게 원인과 결과만을 따지며 역사의 기록물로만 치부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지구 상에 창궐하기 전 지구는 풍요로웠고 아름다웠다. 각 나라로 여행을 즐기고 4차 산업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온 지구는 들떠 있었다. 그 속에서 간간히 부각되는 기후 위기 논쟁은 관심 밖이었다.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UN에서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라고 호소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분노 조절 문제에 애써야 한다”며 조롱했을 정도였다. 어쩌면 온 인류가 동시에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잠시 멈추고서 자신들을 다시 되돌아보라는 경고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펜데믹’의 태풍의 눈 속에 들어서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접해 본 필라테스 수업은 많은 느낌을 안겨준다. 지금까지 이렇게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바라보며 운동을 한 적은 없었다. 예전에는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운동을 했다면, 지금은 오직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나의 건강을 위해 몸을 움직인다. 그동안 바쁘게 앞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나의 몸과 마음, 이제는 오로지 내 주변, 마음을 챙기며 내 몸을 가다듬는다. 지금 ‘코로나 펜데믹’ 속 우리 인류도 투명한 거울 앞에서 자신들의 모든 부분들을 구석구석 되돌아보며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좀 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좀 더 느리게 가는 법을 배우고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겨울잠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곰처럼 앞으로 다가올 온 인류의 봄을 애타게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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