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이제 영어 단어 안 외워도 돼?

프롤로그

Chat GPT가 네이버를 이긴 어느 날

"엄마, 영어 단어 몰라도 ChatGPT가 다 알려주는데, 왜 외워야 해?" 아이의 이 한마디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놀라서가 아니라, 너무 정확해서였다. 며칠 전, 딸아이가 영어 숙제를 하다가 ChatGPT를 열었다. 모르는 영어 단어 여러 개를 한 번에 입력하더니, "이 단어들의 뜻을 알려줘"라고 물었다. 몇 초 만에 화면에는 각 단어의 뜻과 예문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나타났다. 아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네이버 사전을 켰다. 똑같은 방식으로 여러 단어를 한꺼번에 입력했다. 하지만 네이버는 한 번에 한 단어씩만 검색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이버는 불편해. 다시 안 쓸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 아이는 이미 'AI 네이티브'였다. 한 번에 하나씩 검색하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 세대와 달리, 이 아이에게는 한 번에 여러 질문에 답하는 것이 기본값인 세상이었다. 며칠 뒤, 이번엔 나노바나나(Nano Banana)에게 자신의 사진으로 피규어를 그려달라고 했다. 나노바나나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놀라웠다. 마치 바비 인형이 박스 안에서 꼬마 아이들에게 "나를 집에 데려가줘"라고 유혹하는 모습처럼 꽤 그럴듯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색깔을 바꿔달라, 배경을 바꿔달라 여러 번 수정을 요청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충격이었다. 내가 수십 년간 외워온 영어 단어들로, 이 녀석은 이렇게 쉽게 무언가를 만들어낸다고? 내가 미술학원에서 몇 년을 배워도 그리지 못할 그림을, 이 아이는 문장 하나로 뚝딱 만들어낸다고?


대치동 학원가보다 실리콘밸리의 흐름을 봐야 하는 이유

그날 밤, 나는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대치동 학원가에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풍경. 문제집을 몇 권 풀었는지가 곧 성실함의 증거였던 시절. 영어 단어장을 달달 외우며 "이게 어디 쓰이려나" 생각했던 그때. 하지만 지금 아이 앞에 있는 세상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판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에게 묻는다. "이 문제 풀 수 있어?" "정답이 뭐야?" "남들보다 빨라야 하지 않아?" 하지만 AI는 이미 정답을 찾는 일에서는 인간을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다. 2024년 9월, OpenAI는 o1 추론 모델 성능을 공개했다. OpenAI에 따르면 o1은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 수준의 선발 시험에서 약 83%의 정확도를 기록했다. 이 정도의 속도와 정확도는 단순 반복 훈련만으로는 따라가기 어렵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계산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AI는 이제 코딩, 글쓰기, 법률 검토, 심지어 창작 영역까지 진출하고 있다. 암기와 반복 훈련으로 쌓은 숙련도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오늘 기준으로 AI의 수학 실력은 냉정하게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AI는 아직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본선에서 금메달을 따는 세계 최상위 인간 수학 영재의 영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본선 문제는 단순한 계산 능력이 아니라, 증명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고 중간에 전략을 수정하는 직관과 완주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사고가 우위에 있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낮추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각국 국가대표를 가르는 IMO 선발 시험, 즉 국가 수학올림피아드 상위권 진입선에서는 이미 AI가 인간을 넘어섰다. 반복 훈련과 패턴 인식, 고난도 문제 해결 속도와 정확도에서 AI는 인간 수험생이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다. 인간 기준으로 보면 수학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레벨, 대치동 학원가로 치면 올림피아드 대비반 상위권에 해당한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문제를 많이 풀고, 더 빠르게 정답을 맞히는 경쟁은 더 이상 인간에게 유리한 게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AI는 이미 국가대표 선발선까지 올라와 있다. 지금 아이들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옆자리 친구가 아니라, AI를 도구로 쓰는 다른 인간들이다. 그래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니?"가 아니라, "이 문제는 왜 중요한 문제일까?", "다른 조건이라면 어떻게 달라질까?", "이 문제를 현실의 어떤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묻는 능력 말이다. 정답을 찾는 능력은 이미 기계의 영역이 되었다. 앞으로 인간에게 남는 경쟁력은 문제를 정의하고, 맥락을 읽고, 의미를 설계하는 힘이다. 암기왕이 아니라 지휘자가 필요한 시대, 아이 교육의 기준도 그 지점에서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어 단어를 외우지 말아야 할까? 아니다. 오히려 더 잘해야 한다. AI가 내놓은 그럴싸한 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미묘한 뉘앙스가 내 의도와 맞는지 판단하려면 결국 내 머릿속에 언어의 감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롬프트, 즉 질문의 수준이 곧 답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에는 아는 만큼 더 좋은 답을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외우는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과거에는 단어를 외워서 시험지에 정답을 쓰는 것이 목표였다면, 지금은 그 단어를 가지고 AI에게 정확한 질문을 던지고, AI가 준 답을 검증하고, 그것을 내 맥락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10년 뒤, 당신의 아이는 누구와 경쟁하게 될까?

이제 경쟁은 바뀌었다. 아이들이 앞으로 경쟁해야 할 상대는 옆자리 친구가 아니라 AI를 더 잘 활용하는 다른 인간들이다. 10년 뒤, 당신의 아이는 이런 사람들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ChatGPT에게 5분 만에 마케팅 전략 초안을 받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인사이트로 재가공해 설득하는 동료. Midjourney로 10가지 디자인 시안을 뽑아낸 뒤, 고객의 브랜드 정체성에 맞는 하나를 골라내는 감각을 가진 디자이너. Deep Research로 산업 데이터를 분석하고 젠스파크로 프레젠테이션까지 제작해낸 뒤, 그 안에서 전략적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컨설턴트. 이들은 AI를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마치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듯, 이들에게 AI는 일상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하나다. 이 시대에,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나는 마케터로 20년 넘게 일해왔다. 삼성, LG, 현대, 한화, 신세계 등 국내 대기업을 두루 거치며 수많은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부서에서 사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나는 묘한 현상을 목격했다. 지금 20대들은 분명 우리보다 더 많이 공부했다. 인터넷 강의도 듣고, 대치동 학원도 다녔다. 하지만 회의록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 현상에 대해 '왜?'라고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질문하는 능력이 자라지 못한 것이다. 요즘 기업이 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 점과 점을 연결해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 기술 위에 사람의 맥락을 얹을 수 있는 사람. 한마디로 말하면, 지휘자 같은 인간이다. 주어진 악보대로 연주만 하는 기능인이 아니라, 전체를 조율하며 지휘봉을 잡는 리더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역량들은 어릴수록 더 잘 자란다.


이 책은 아이에게 AI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부모가 먼저 사고방식을 바꾸는 책이다. 더 나아가,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우리 모두의 생존 전략서이기도 하다. 영어를 더 잘하되 다르게 배워야 하는 이유, 코딩 학원보다 중요한 컴퓨팅 사고력, AI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구로 쓰게 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스스로 질문하는 리더로 자라게 하는 법. 이 책을 덮을 때쯤,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질문은 무엇일까?" 그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아이의 미래는 이미 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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