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을 위한 분갈이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나는 일

by 아네스장

식물은 자라다 보면 화분이 작아져 뿌리가 엉키고,

스스로 숨 쉴 틈도 없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뿌리를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더 넓고 새로운 흙으로 옮겨야 한다.

분갈이는 더 크게 자라기 위한 일,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를 다시 살려내기 위한

작은 응급처치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오랜 시간 디자인을 업으로 살아왔지만,

스스로 더 크고 영양분이 있어보이는 화분으로 옮겨갔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뿌리를 내려보지도 못하고

내의지와 상관없이,

좋아보이거나 맞지도 않아보이는 화분으로 옮겨심어졌다.


디자인이라는 화분에서,

브랜딩이라는 화분에 잠깐 머물다가

‘방재’라는 낯선 화분으로 심겨진 것이다.


그렇게 낯선일 앞에

한동안 멈춰 서야 했다.

길잃은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때 나는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았고,

정확히는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뜻하지 않은 변화 속에서

그저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 목표였던 시간.

이전처럼 일하지도, 이전처럼 살아가지도 못하던 날들속에서 나는 조금씩 리듬을 다시 세워야 했다.


새로운 환경, 낯선 역할.

이 모든 것이 나를 무겁게 눌렀지만

그 안에서도 나만의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침이면 카페에 들러 글을 썼고

점심이면 산책을하며 몸과 마음을 돌봤다.

산책길 발견한 도서관과 성당을 안식처 삼아 잠시 쉬는 시간도 챙겼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하루를 단정히 쌓아가며

지금까지의 일을 돌아보고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어떤 일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인지,

무엇을 오래도록 고민해왔는지를

조금은 더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창작’이라는 언어는 여전히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동력이었고,

디자인과 글쓰기는 지금의 나를 회복시키는 숨결이었다.



그런 시간 속에,

감사하게도 오랫동안 함께해온 디자인 커뮤니티

〈프롬나드 디자인연구원〉과 함께

열 번째 책 《다음; 생존을 디자인하다》에

‘디자이너의 분갈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이야기를 실을 수 있었다.


이번 책은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시선을 모은 기록이 되었다.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디자인이라는 일과 그 곁의 감각들을 놓지 않았던 시간들을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생존이었고,

곧 나의 삶을 다시 분갈이하는 경험이 되었다.



직선처럼 이어지는 커리어가 아니어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음에

오늘도 나만의 작은 리듬을 찾아

조용히, 다음으로 나아갑니다.


다음을 위한 분갈이로

나답게 살아나는 리듬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을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혹시 요즘,

‘나는 어떤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지?’라는

질문이 마음에 머물고 있다면,

그건 어쩌면,

다시 살아나는 길 위에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단정한 루틴과 나를 찾는 과정’을 기록하는

브런치 연재 시리즈 《나답게 살아나는 중입니다》의 세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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