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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형님. 편히 쉬세요.

“엄마, 형아네 와이프를 뭐라고 불러야 해?”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어우~~ 그건 엄마가 큰 엄마 부를 때 하는 말이지. 징그러 어떻게 그렇게 불러. 그냥 언니라 하면 안 되나? 난 그냥 언니라 부를래.”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첫 시댁 방문을 하는 날.

이바지 음식을 준비하시던 친정 엄마와 철부지 새댁의 대화였다.


시댁에 도착해  주방에 있던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뒤돌아선 그녀가 말했다.

“음.. 자네 왔는가”


순간 내 입에서 마치 백번은 연습이 된듯한 자연스러운 호칭이 튀어나왔다  

“네, 형님! 일찍 오셨어요?”


카리스마 넘치는 한 마디에 난 무릎을 꿇고 엄마가 큰 엄마를 부를 때나 쓰시던 그 호칭을 툭 뱉었다.

나보다 겨우 세 살 많은 ‘형님’이었다.


아주버님의 석사 논문들이 우리 집에 있어 남편에게 저거 왜 아주버님이 안 가져가시냐 물었더니 special thanks to에 있는 정희가 지금 형수가  아니라서 형아가 못 가져간다고.. 걸리면 죽음 일거라고 했다.

그래서 아주버님의 논문들은 우리가 미국에 오기 전까지 남편 방 책장에 꽂혀 있었다.

아주버님의 전 여자 친구와 이름이 뒷 글자만 같았던 우리 형님.


조용하고 묵직한 성격이기에 까불거리는 나와 잘 맞지 않기도 했고 멀리 떨어져 살아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 아니면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이십오 년 동안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갔다.


예나 지금이나 ‘학자’를 남편으로 둔 아내들은 참 고생이 많다.

“내 큰 아들은 학자다”라는 어머님의 자부심 뒤에 오랫동안 여러 모로 고생이 많았던 형님이 계셨다.

아주버님의 영국 유학 시절에도 형님은 힘든 시간을 타지에서 홀로 잘 이겨 내셨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꿋꿋이 맏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너무도 잘해 내셨던 분.

형님을 보며 ‘맏며느리 감은 하늘에서 내린다’는 옛말이 절대 틀린 얘기가 아니구나 했다.

진중함으로 늘 집안의 중심을 잘 잡아 주셨던 분.




‘학자’ 였던 아주버님이 늦은 나이에 직장에 들어가시고 이제야 형님이 좀 편하게 사시겠구나 하며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몇 년 후 형님의 병환 소식을 들었다.

암 선고를 받으시고도 형님답게 흔들리지 않고 당신 소신대로 잘 조리를 하시기에 이대로도 쭉 잘 견디며 계시겠구나 했다.

전화를 자주 하는 살가움이 부족한 나는 편찮으신 형님에게 뭐라 말을 전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늘 전화 걸 때를 놓쳤다.

시한부 판정을 받으신 분께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 피했다는 말이 더 맞겠다.

한국에 갈 때마다 만나는 형님은 좀 더 수척해져 가기는  했지만 안색도 좋고 경과도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어쩌면 나아지실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다음번 만남을 기약했었다.


얼마 전 척추로 암이 전이됐다는 소식을 남편이 전해 주기에 병원 입원하시기 하루 전에 통화를 했다.

목소리에 힘도 있고 척추 치료받아 다리 통증만 없으면 살겠다는 말씀에 치료 잘 받으시라고 퇴원해 또 통화하자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대학 병원에 입원하셨던 형님은 그곳에서 바로 요양 병원으로 옮기셨다.

조카와의 카톡 대화로 오전에는 상태가 괜찮으시니 오전 중에 통화를 다시 하겠다 했다.

그다음 날엔 전화를 못 드렸고 다음날 오전에 통화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 저녁부터 형님은 혼수상태에 들어가셨다 했다.  

조카와 통화하며 다시 눈을 뜨실 테니 엄마 눈 뜨시면 전화 달라 말했다.

몇 시간 후 조카가 전화를 했다.

왠지 받기가 싫었다.

조카가 울먹이며 방금 돌아가셨다 했다.

그 전화가 너무 받기 싫었었다.






나는 가족을 처음으로 준비 없이 잃어 봤다.

시아버님께서 몇 년 전에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오래 편찮으셨고 쭉 누워 계시는 모습을 봐왔기에 아버님의 돌아가심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형님은... 비록 척추로 암이 전이됐다고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잘 이겨 내실 거라고 믿었나 보다.

그래서 여름에 한국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형님~~ 하며 대전으로 가면 어~~ 자네 왔는가 하며 다시 맞아 주실 줄 알았다.

이렇게 돌아가시게 될 거란 생각을 못했다.

이렇게 다시 못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못해봤다.

그분은 거기 항상 계셔 주실 줄 알았다.

25년 전처럼 무뚝뚝해도 따뜻하게 거기서 반겨 주실 줄 알았다.






당신 죽음을 준비하셨던 형님은 영정 사진도 당신이 골라 두셨단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나는 장례에 오지 말라고 마음만 받겠다는 말씀도 남겨 두셨단다.

이제 겨우 쉰다섯이 된 형님이 그렇게 당신 죽음 뒤를 준비하고 계셨단다.

‘학자’ 같은 남편과 철부지 스물 다섯 외동딸을 남겨 두고 가실 준비를 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진다.






격리 때문에 한국으로 가지 못하는 나는 이 먼 곳에서 나대로의 애도를 한다.

연도를 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 하고 그리고 형님을 기억한다.

살아 계실 때도 부족함이 았던   동서는 돌아가신 뒤에도  드릴수 있는   없다.


형님이라 불렀지만 어느새 내가 부르고 싶었던 호칭 ‘언니’ 같았던 형님.


많이 고마웠어요.


그리고 너무 미안해요.

무심해서 너무너무 미안해요.

형님이 안 계실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해봐서 미안해요.


전화라도 한번 더 해볼걸 이라는 후회를 저는 참 오래 하고 살 것 같아요.

이제는 편안히 쉬시기를.

다음 생에는 꽃처럼 사시기를.



제 형님 양 여정은 좋은 아내로 좋은 엄마로 훌륭한 며느리로 멋진 내 형님으로 짧은 생애를 참 잘 사시다 4월 16일에 영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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