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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판 엄마

쓸데 없는 책임감에 허덕 허덕.

작년에 화분에 담긴 상추 모종을 받아 키워 한참을 뜯어먹으며 나도 내년에는 씨를 직접 심어 상추를 키워보리라 마음을 먹었더랬다.

그래서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빈 달걀판에 흙을 담고 상추 씨를 심어 주었다  

열심히 물을 뿌려주니 새 싹이 뽀록 뽀록 올라오고 예쁘고 고운 잎들이 작게 자라기 시작했다.

작년에 받았던 모종 만한 크기로 자라면 흙에 옮겨 심어 줘야지 하고는 상추 싹이 자라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자라던 상추 싹은 열심히 물을 줘도 더 이상  커지지를 않았다.


작은 상추 싹에 물을 두어 달 주다가 ‘에잇 작아도 그냥 흙에 옮겨 심어 보자’ 하며 오늘 아침에 달걀판에서 싹들을 빼내다가 깜짝 놀랐다.

달걀판 한 칸 안에서 작은 싹이 만들어낸 뿌리가 얼마나 길던지.

손가락 두 마디도 안되는 흙덩이 안에  뿌리가 상추 싹 크기보다 몇 배는 더 길게 뭉쳐 있었다  

진작에 넓은 땅에 옮겨 심어 줬으면 훨씬 크게 자랐을 상추를 작은 달걀판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게 하고 있었다.

작년에 받았던 모종이 제법 큰 화분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뿌리를 내릴 흙이 있어야 싹들이 자라 모종이 되고 나무가 되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문득 나도 작은 달걀판 같이 작고 좁은 내 안에 아이들을 너무 감싸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또 보호라는 이름으로 작은 틀에 아이들을 가둬두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가을에 보스턴으로 떠나는 작은 아들이 여태 까지 맞은 모든 백신들의 기록이 필요하다길래 오늘 다니던 소아과에 갔더니 그중 두 가지 백신이 맞은 기록이 없다 했다.

영주권을 신청할 때 지정 병원이 있었기에 거기서도 접종을 했는데 보험을 바꾸고 종합병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록이 누락이 됐었다.


요구하는 모든 백신의 접종 기록이 없으면 입학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엄마는 멘붕이 됐는데 늘 어리게만 느껴지던 작은 아이가 병원과 통화를 하고 다니던 종합 병원에 가서 간호사와 얘기를 하며 누락됐던 기록을 찾아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내가 이 아이에게는 좁은 달걀판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있는 아빠 대신 엄마가  해결  줘야 한다는 어설픈 책임감에 혼자 허덕이며   일찍   있었던 아이를   감싸고 안아 길게 뿌리만 내리게 하고 있었나 보다.

자립할 준비가 아이는 되어 있는데 모자란 엄마가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가을이면 내 곁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작은 아이와 일 년 더 준비해서 세상에 나갈 큰 아이.

이 아이들이 넓은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잎을 피우기 위해 달걀판에서 벗어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좁은 달걀판 엄마 안에서 사랑으로 아이들이 뿌리를 길게 내렸으니 어디서건 그 긴 뿌리로 흙에 단단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옮겨 심은 상추는 금새 커질것이다.

그리고 나를 떠나는 내 아이들도 어디서든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땅에서 뿌리를 굳게 자리 잡고 잘 커 나갈 것이다.

새 처럼 넓은 하늘에서 커다란 날개를 펼칠 내 예쁜 아들들.


이제 엄마 도움 없이도 아이들은 스스로 잘해 나간다.

달걀판 엄마의 할 일은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내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해야겠다.

그동안 수고한 나를 위해 치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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