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넷. 무게를 싣다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피아노 짚고 싶어」
나이를 먹고 회사가 나인지 내가 회사인지
모를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먼지 쌓인 건반 앞에 앉았다.
쇼핑백도 몇 개 치우고,
널브러진 빨랫감도 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건반을 짚을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튜닝 상태에 헛웃음이 스며들고
이내 짭짤한 물맛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날 나는 충동적으로 전자 키보드를 샀다.
나는 학창 시절 합창과 지휘를 했다.
교내 대회, 지구 대회, 시 대회, 전국 대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 곁에는 항상 건반이 있었다.
서른 즈음, 이제 그 시절이 그리울 때도 된 것이다.
그 날 이후 건반은 언제나 열린 상태를 유지했다.
악보를 접어두고, 인터넷을 뒤져 코드 보는 법을 익혀,
치고 싶은 곡을 내 귀에 들리는 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치는 것'이라기보다 '짚는 것'이 아닐까.
무게를 실어 짚는 것, 그 무게를 옮기는 것.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건반을 짚기 시작했다.
참 못 치는 피아노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추상화 빼고는 A를 받아본 적 없는 내가
그림도 그리는데.
오늘도 건반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무게를, 후회를 짚어 실어본다.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