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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넷. 무게를 싣다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by
선량한해달
Apr 26. 2019
「피아노 짚고 싶어」
나이를 먹고 회사가 나인지 내가 회사인지
모를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먼지 쌓인 건반 앞에 앉았다.
쇼핑백도 몇 개 치우고,
널브러진 빨랫감도 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건반을 짚을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튜닝 상태에 헛웃음이 스며들고
이내 짭짤한 물맛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날 나는 충동적으로 전자 키보드를 샀다.
나는 학창 시절 합창과 지휘를 했다.
교내 대회, 지구 대회, 시 대회, 전국 대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 곁에는 항상 건반이 있었다.
서른 즈음, 이제 그 시절이 그리울 때도 된 것이다.
그
날 이후 건반은 언제나 열린 상태를 유지했다.
악보를 접어두고, 인터넷을 뒤져 코드 보는 법을 익혀
,
치고 싶은 곡을 내 귀에 들리는 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치는 것'이라기보다 '짚는 것'이 아닐까.
무게를 실어 짚는 것, 그 무게를 옮기는 것.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건반을 짚기 시작했다.
참 못 치는 피아노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추상화 빼고는 A를 받아본 적 없는 내가
그림도 그리는데.
오늘도 건반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무게를, 후회를 짚어 실어본다.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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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과정 속에 생각을 담다.' 다양한 울타리 안에서 방황하며 머물다 갈 사람, 감성 담은 글과 그림을 연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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