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마흔넷. 펜촉

떠나보내는 마음

by 선량한해달

「잘 가.」


'어? 여기 왜 점선이지?'


땀과 유분이 얼룩지면 선이 밀린다.

그런 일이 생기면 화면을 알코올 솜으로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을 쐬곤 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선이 밀리다 못해

끊어지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펜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채기 전

하루 정도 나는 내 손을 의심했다.


짧은 기간 사이에 그린 그림의 양을 생각해보면

문제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펜을 들여다보니 펜촉이 한쪽으로 많이 눌려있다.

'디지털 펜도 닳는구나….'


급히 새 펜을 주문하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다가

처음 그린 그림을 발견했다.


두 그림 모두 나를 그린 자화상이었는데

고개 숙인 나와 바다를 바라보는 내가

거친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너 그림 많이 늘었더라. 그리고 많이 변했어."


친구의 그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 첫 그림에는 거칠고 솔직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이 작은 펜이 온몸으로 내 감정을 받아내느라

고생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비록 선은 끊어지지만 내 손에 익숙한

촉 눌린 첫 펜을 당분간 같이 사용하려 한다.


떠나보내는 마음에도 정리가 필요 법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씨앗 마흔셋. 그 순간이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