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인간 존엄에 대하여

by 아궁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이라는 영화를 보는 동안 소설 하나가 생각났다.


뛰어난 작품이라도 한 번에 읽히지 않고 곱씹게 되거나 구토와 두통을 유발하는 책들이 있다. 근데 읽고 나면 진한 잔상과 여운이 오래 남는 그런 책 말이다. 첫 시도에 몇 장 읽다 덮어버리고 그러다 좀 지나 생각이 나면 다시 읽고, 또 한 참 지나 우연히 앉은자리에서 다 읽고는 울렁이는 속을 겨우 달래는 그런 책.

'멋진 신세계'라는 책이 그중 하나이다. 평소 내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상, 공상을 소설로 써보라며 한번 읽어봐 재밌을 거야 하고 툭 던진 그 책방 언니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책이다.


올더스 헉슬리, 이 영국 작가는 1932년, 미국발 대공황 여파 속에서 극심한 경기 침체와 실업난으로 사회 전반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시대에 '멋진 신세계'를 써냈다. 서기 2540년, 먼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무시된 과학 기술 중심 사회를 그려낸 그의 기발한 상상력이 차갑고도 절제된 문체로 담겨 있다. 짙은색 물감 덩어리를 갖다 무덤덤히 툭툭 올려놓은 듯한 유화처럼 진하고 무거운 그의 상상세계가 흥미를 끈다. 이 작품에서 온 세상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이 난무한 사회, 그것을 누리는 것이 문명인으로서 당연한 권리라 여기며 산다. 현존하는 도덕이나 양심은 철저히 과거에 묻힌 야만인의 상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미래세계이다. 헉슬리는 탁월한 통찰력과 때로는 날카롭고도 냉소적인 유머를 통해 기술 만능주의와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예리하게 풍자한다.


작가가 상상한 서기 2540년은 인간의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쾌락 추구와 계급 세뇌 교육, 끝없는 소비생활을 통해 체제를 유지시키는 사회인데, 인간은 계급(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에 따라 조건과 환경, 역할이 다르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이 시험관(병 속)에서 대량 생산된다. 알파에서 엡실론으로 갈수록 존재가 최고 계급에서 하찮은 계급이다. 입는 옷 색깔과 외모로 계급이 드러나며 낮은 계급일수록 수정란을 열등한 환경에서 분열되도록 조작하고 산소공급을 제한하면서 신체적 결함이 있는 일란성쌍둥이로 만들어내 같은 자리,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한다. 난소를 산 채로 떼어주는 수술을 자원하면 6개월치 월급만큼의 돈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다고 대상자를 모집하는 연구소, 태아를 배양하고 하나의 난자에서 최대 95명가량의 일란성쌍둥이를 만들어 내며 과학기술업적을 자랑한다. 사회 필요에 따라 태아기 동안 또는 생후 몇 개월, 부화한 이후로도 몇 년 간을 각 계급의 인간에게 조건반사를 훈련시켜 인간계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기 계급을 싫어하지 않도록 인간의 정신을 통제한다. 꽃을 보며 본능적으로 누리는 정서적 풍요로움까지도 노동에 필요 없는 것들이라며 공포로 바꿔 차단시키고는 그 결과 공동체에 더 높은 생산성을 가져다준다며 과학기술 업적을 자랑하는 세상이다. 각 국의 언어는 사라지고 세계언어를 구사하는데 시험관에서 부화하는 인간에게 더 이상 '부모'라는 단어가 매우 상스러운 말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살면서 읽은 소설 중에 충격적이면서 가장 매스껍고 인상 깊었던 공상과학소설로 기억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레니나와 헨리가 헬리콥터를 타고, 오렌지빛 노을이 물든 저녁 하늘을 날며 슬라우 화장장(Slough Crematorium)을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동등하다. 게다가, 엡실론조차도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수행한다.”

헨리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죽은 뒤 인간이 남기는 동일한 양의 ‘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All men are physico-chemically equal,....) 계급이 가장 낮은 엡실론이라 할지라도, 죽은 후에는 식물을 살리는 비료로서 같은 가치를 지닌다. 삶의 전 과정이 철저히 계급에 의해 구분되고 통제되지만, 죽음 앞에서는 결국 모두가 하나로 돌아간다.


인간의 존엄을 철저히 지워버린 사회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평등은 죽음 이후에야 완성되는 모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 차별과 편견이 당연한 세상, 잿빛 가득한 사회일지라도 여전히 자연은 아름답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자연마저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그려져서 그런 걸까? 해가 질 무렵 변하는 하늘의 색채와 계절이 주는 변화의 아름다움, 소설 속 그 아래 인간들은 너무나 비참하니 말이다.


아, 맞다. 그 가운데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존중되는 세상에 살기를 절규하는 한 인간(야만인이라 불리던, 존)의 죽음, 그 자체가 인간성의 죽음을 묘사하는 듯 인상적이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인간을 대량 생산하지는 않지만,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부품처럼 여기는 자본주의 역시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눈에 보이는 알파~엡실론까지의 계급은 없지만, 지식과 부의 축적 정도에 따라 모두가 인식할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도 존재한다. 인간성 보다 우선하는 돈의 위력으로 수많은 청년들이 가치로운 일보다는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찾는다.


많은 돈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다스리는 사회.


소설 속 세상처럼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차별은 아니라도 그 소설이 지금 우리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는 서글픔이 남는다.


작가는 누구보다 인간 존재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산업과 과학이 발전해 갈수록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겠지? 그래서 우리에게 상상해 보라고 지금처럼 자신과 이웃을 사람들을 기계 부품으로 여기 다간 이런 세상이 올 거라고 경고한 것이리라.....

인간의 욕망은 그 시대 아니 훨씬 그전 시대에도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인간 존재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려는 노력은 항상 필요했던 것 같다.


신이 흙으로 지은 인간의 몸은 돈 되는 물질로만 따지면 고작 한 줌이겠지만,

신의 영을 불어넣은 인간의 존재는 물질이나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얼마 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나?

그대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진정 아는가?



신은 우리 인간을 만들고 기쁨을 이기지 못할 만큼 행복했다고 한다.

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지어졌다고 했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고 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말속에서 자랐다.

'훌륭한 사람 되거라. 착한 사람 되거라. 공부 열심히 해서 효도해라 등.'

좋은 학교, 좋은 직장, 효도, 결혼 — 그 모든 과업이 마치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 된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시기가 늦으면 불안해하며, 결국 자신을 잃어버린다.


인생에 과업이 있긴 해야겠지만, 그 시기가 모두에게 똑같아야 하나?


대학을 꼭 20살에 가야 할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더 찾아본 후에 결정하고 싶을 수도 있지.

3억대 1의 경쟁을 뚫고 태어난 우리는 내내 달음질해 왔다.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며,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한 끝에 대학을 가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을....


결혼을 꼭 남들 다 가는 그 시기에 해야 하는 걸까?

평생을 살아갈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더 신중할 수도 있지.

(뭐 신중해도 그놈이 그놈인 것은... 좀 신뢰가 가지만)


그렇게 무언가 되어야 했던 우리였기에 직장을 다니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쉬어보는 육아휴직을 견디지 못하나 보다. 세상 소중한 내 아이를 키우는 멋진 시간임에도 마음이 초조하고 다급하다.

조리원 동기들끼리마저 아이 몸무게, 키, 젖량, 분유량, 잠자는 시간분량 등을 비교하며 내가 과연 좋은 엄마인가 의심하고 때로는 확인한다.


어떤 날은 이렇게 똥기저귀를 가는 동안 동기와 후배들이 앞서 달려갈 걱정에 제대로 잠도 못 자 몸조리도 못하고선 복귀를 다짐하고, 막상 출근을 앞두고는 잠든 아이를 안고 펑펑 운다.

우리는 왜 엄마로서 아이를 키워내는 그 소중한 시간이 직장인으로서 살아가는 삶보다 못하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속 설계된 인간계급처럼 인위적으로 운명을 결정하듯이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마치 조건반사를 훈련한 인간처럼 인생의 아름다움을 공포로 인식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사는 걸까?


학력, 재산, 유산, 외모, 수많은 조건이 우리 자신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별 볼 일 없다면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일까?


주어진 아름답고 귀한 인생을 자책하고 후회하며 보내는가?

작은 삶의 시간도 누리질 못하고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는가?

'멋진 신세계'의 작가가 상상한 미래와는 조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당신으로 인해 멋진 곳이기 때문에....





*캄보디아로 고수익 일자리를 찾아 떠난 후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청년들의 뉴스를 접한 밤에... 곱디고운 청춘들이 납치된 현실에 눈물이 나 잠 못 들고 끄적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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