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John Ber)

너에게로 가는 길

by 아궁이

지난 2주간 너무 빠른 인사개편과 조직개편이 단행되고 있다.

갑자기 본부와 직원들을 뒤흔드는 회사의 조치가 매우 불편하고 화가 난다.


새로 부임한 본부장은 '실적과 성과'중심으로 앞으로 본부를 이끌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회사의 핵심인 우리 본부 실적이 지난 5년 대비 역대최저를 기록하고 있다며 혁명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효율적인 업무 방식이면서 동시에 원거리 출퇴근하던 직원들에게는 최고의 복지였던, 재택근무는 조만간 빠르게 폐지될 것이라는 것과 지금 프로젝트 매니저팀 인력은 너무 많아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망설임 없이 던지던 그녀의 카리스마는 너무 강력해서 누구도 질문 하나를 던지지 못했다.


어느 대륙의 원주민을 단숨에 제압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 버린 정복자.


회사 유일한 글로벌 연구 매니저인 나는 이제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사실 이전 본부장, 부서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 이렇고 저런 비전을 차근차근 확인해 온 것도 아니었는데, global 수준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때마다 지지해 주고 적극 지원해 주던 보스가 해고되니 목표점을 분명히 두고 달리다가 어딘지 모르는 들판으로 쫓겨난 기분이랄까?


새 본부장, 그녀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생각으로 들었다.


첫째, 실적은 회사를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기준이지만, 장기적 관점, 윤리성, 직원 복지, 조직 문화와의 균형이 함께 고려되어야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한 것 아닌가?

둘째, 그녀가 제시하는 업무 환경은 직원에게 큰 스트레스와 압박을 주어 번아웃이나 퇴사를 초래할 수 있고 또한, 창의적인 시도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투자보다는 눈앞의 성과에만 집중하게 되어 조직의 미래를 해칠 수 있지 않나?

결국, 고객의 진짜 니즈보다는 수치에만 집착하게 되어 퀄리티 문제 해결은 멀어질 것이고 그로 인해 당연히 신뢰를 잃고, 브랜드 가치도 하락하게 되지 않을까? (실제 그녀는 퀄리티 따위는 생각 안 한다고 했다)


이를 악물고 아무도 듣지 못할 마음속에서 그녀의 한 마디 한마디에 반문하였다.


새 본부장은 그렇게 본부 첫인사를 마친 후 곧이어 몇몇 사람들과 면담을 시작했다.

그동안 이 상황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토로하던 한 프로젝트 매니저는 그새 태도를 전환해 새로 부임한 본부장이 제안한 부서장 자리를 수락했다고 한다.


당장 퇴사할 것처럼 같이 화를 내더니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


며칠간 속이 시끄러워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이 일들이 있기 한 달 전, 회사 마케팅 부서장과 부사장님이 나한테 다녀오라고 부탁한 A국 출장을 새 본부장은 다른 사람이 가는 게 좋겠다 했다.

나한테 아직까지 면담을 진행하지 않은 새 본부장의 본심이 궁금하기도 하고 global과제에 관심 없는 그녀에게 나는 부담스러운 존재일까, 인사개편으로 내치려나 의심되기도 한다.


혹은 아예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이곳으로 이직해 왔을 때 나는 이곳을 마지막 회사로 정년까지 남은 시간을 충성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동안 남 좋을 일만 실컷 하고 퇴사한 경험이 몇 번 있다.

육아휴직 후 복귀하려는데, 회사사정이 좋지 않으니 복귀하지 말고 이직하라는 회사 팀장의 권고를 수렴해 버린 그때는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나는 언제나 회사가 나를 위해서 좋은 제안만 할 것이라 믿어왔다.

회사와 나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철저한 계약관계이며, 회사 사정에 따라 해고해 버릴 수 있다는 그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인격체를 대하듯,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살신성인의 자세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머슴처럼 일했다.


그게 성실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성실하던 나는 우리 그룹이 인력감축을 해야 할 코로나 시국엔 나보다 경력이 없던 후배가 눈물로 걱정하며 갈 곳이 없다 토로할 때, 제한된 자리를 두고 서로 경쟁하고 싶지 않아 나서서 퇴사했다. 그땐 그게 마음이 편했다. 내가 그 아이를 이기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 후배가 내 삶을 책임질 것도 아닌데.

실제로 그때 이후 2년간은 불황과 함께 이직이 어려웠다.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감정에 휘둘리고 인간관계를 앞세워 의미 없는 오지랖 부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잘 안 변하듯, 지금 내 마음도 여전히 생긴 대로 작동하고 있다.

나를 선택해 줬고 어떤 의견을 제안하든 지지하던 리더의 해고,

우리 본부의 미래와 거시적인 안목은 사치로 생각하는 새 보스의 등장.


나는 어찌할꼬..


그녀에게 '나에겐 그런 비전이 없다'는 말을 직접 듣기 전에 먼저 퇴사할까?

그동안 회사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의미가 없어져 다시 글로벌사로 돌아간다고 할까?

2년마다 실적이 나아지지 않으면, 언제든 조직의 리더와 비전을 갈아치우는 회사 운영 방식에 동의가 안되니 나는 떠난다 할까?




몇 날 밤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나를 보며 남편은 말했다.

"존버가 winner야."


이 말뜻을 몰랐던 그 시절엔 존버가 누구야? 했었다.

존 x 버티기. 의 줄임말 '존버'.

그냥 버티라고 하지 뭘 그렇게까지 표현하나? 비속어에서 비롯된 이 말은 왠지 어감이 별로어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근데 지금의 나는 그 말의 처절함이 더 절절하게 이해된다.

버티는 것이 쉽지도 않지만, 버티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내 숱한 감정들이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정신 바짝 차리고 버티는 것, 그게 진짜 존버였다

이 시대를 사는 대한의 국민들은 이렇게 버티며 산다. 그래 그랬던 거구나.


새 본부장은 아직 나에게 아무 말도 아무런 조치도 행하지 않았다.

존버(John Ber)... 네가 답이라면 나는 앞으로 닥칠 일들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걸까?


우선은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내자.

존버, 너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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