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survived the weather

봄이 오는 것을 기억해

by 아궁이

돌아보면 인생이 쉬웠던 적은 없다.

꿈도 사랑도.

비참할 만큼 엄청난 실패는 아니라도, 남들은 안 겪는 '왜 나한테만?' 하는 역경이 있긴 했다.

이는 각양각색일지라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니, 어쩌면 인생의 순리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점에 생각나는 인생 첫 실패의 순간.

그해 겨울 겪은 시련은 영원히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내 자만심에 큰 한 방을 날렸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나름 자랑거리가 많은 자식이었는데 한 순간에 내놓기 부끄러운 애물단지가 된 것 같았고

가장 예민한 시절에 맛본 인생의 쓴맛은 꽤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괴로운 12월과 더 괴로운 새해 명절을 지나는 동안 나는 자주 골방에 처박혀 시체처럼 누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맹수처럼 서러워 이를 갈고 있는 나에게 찾아와 위로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시고는

옆으로 돌아 누운 내 뒤통수를 몇 번씩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괜찮아, 우리 복순이, 괜찮아.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다."


아빠는 권위적이고 무서운 분이셨지만 우리를 대하실 때 위트와 유머를 겸비한 자상한 분이셨다.

내가 집안 자존심에 먹칠을 한 것 같았는데, 어느 때보다 자상한 목소리로

괜찮다 하시니 돌아누운 내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줄줄 흘렀다.

"밥은 꼭 먹어라" 하시며 등을 토닥여주셨던 그 순간이 종종 생각이 난다.


그 후로 나는 벌떡 일어나 밥을 먹고 골방에서 나왔다.

미용실로 달려가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다.

미용실 아줌마가 몇 번을 물었는지 모른다. "정말 다 깎을 거니? 다 밀어?"

여학생 커트선에서 머뭇거리던 그분께 "군대 갈 거니까 다 밀어주세요" 했다.

"얼굴은 백설기 같고 입술은 앵두 같은데 무슨 군대니?" 하시며 계속 만류하시다가 결연에 가득 찬 내 눈빛을 보시고 싹 다 밀어주셨다.


속이 다 시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땐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잡념을 버리고 다시 달리는데 집중하겠다는 조금은 무식한 결심이었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으신 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자전거를 타고 커다란 강을 가로질러 집으로 오는 동안 두피 사이로 느껴지던 찬바람을 잊을 수 없다.

그때 3월의 강바람은 아직은 차디차면서도 이미 와있는 따스한 봄이 느껴졌다.

'따뜻한 날이 곧 올 거야.'나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듯했다.


인생은 언제나

매서운 바람이 불다가도

따뜻한 봄이 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소중한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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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일어나 찍어둔 깊은 밤 밝은 달>




그 어느 때보다 이번 퇴사는 마음이 이상하다.

앞으로 20년은 잘해나가리라 믿었는데, 그 또한 나의 자만이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20년을 해 온 일,

내가 갖고 있는 간호사 면허,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선교와 봉사.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시간은 참 빨리 흘러간다. 벌써 두 달이 넘어간다.

별안간 백수가 되어 마음이 헛헛하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신나는 마음도 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캐나다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다.

서울인지 캐나다인지 하며 지냈다. 주 5일은 대부분 퇴근 후에도 미팅이 있었고 한국시간에 맞춰 밤늦게까지도 회의를 했다. 미국 프로젝트 팀과 매주 수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갑자기 24시간이 아무런 제약 없이 내 앞에 놓이니 처음 한 달은 아직 실감이 안 났다.


평생 목줄에 묶여 살던 멍멍이가 풀어주어도 멀리 가지 못하는 것처럼 집안에서 랩탑 앞에서만 맴돌았다.


커뮤니티 카페 활동

시간이 생기니, 밴쿠버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는 어떤 곳인지, 여기에서 내가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1년 전에 가입만 겨우 해 놓은 카페를 수시로 들어가 탐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정보들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글은 등업 되지 않으면 읽을 수가 없었다. 카페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는 개수만큼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방문을 해야 문을 조금씩 열어주는 듯했다. 하긴 오래전부터 피땀 흘려 경험하고 얻은 소중한 팁이니 대가 없이 공유하는 것은 아까운 일일 테지 하고 이해하면서도 번번이 읽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니 들어가기 싫었지만, 틈만 나면 카페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었다.

한 달 사이 글을 20개를 써 올렸고, 내가 얻은 따끈한 정보도 공유했으며 건강상담도 여기저기 댓글로 남겨놓았다.

그래서 지금 3단계 등업을 했고 많은 정보와 잡다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No Pain, No Gain~!!


다시 간호사로 도전해 볼까?

내가 가진 모든 것 중에서 간호사 면허가 이곳에서 가장 유용하다.

외국인 노동자를 줄이는 추세이지만, 간호사는 여전히 많이 부족해서 간호인력에 대한 영주권이 열려있다.


서울 S병원 암센터가 내 병원 경력의 마지막이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으니 장롱면허이긴 하지만 제약사에서도 계속 암이라는 질병에 대해 공부했기에 아주 상관없는 일을 해 온 것은 아니다. 게다가 미국 간호사 면허가 있으니 캐나다 국가고시는 면제라서 이 기회를 묵히고 있을 수는 없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가장 먼저 NNAS(National Nursing Assessment Service) 캐나다 간호사 면허 심사 기관에 내가 가진 한국, 미국 간호사 면허를 캐나다로 이전하겠다는 신청서부터 작성해야 했다.


자세한 개인정보 입력과 결재를 완료하면 내 고유 번호가 생성되고 본격적으로 검증을 위한 문서를 업로드하라는 안내가 뒤따른다. 한번 신청서 결재가 되면 중간에 취소를 하더라도 refund 되지 않으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부분이다. 또한, 신청서의 2페이지는 우리나라 보건복지부 담당자가 작성해서 직접 NNAS로 보내줘야 했는데, 가장 까다로운 절차이기도 했다.


모든 자격증과 경력, 공증받은 신분증, 학위 검증을 위한 성적, 졸업증명 문서 등을 3시간이 넘도록 정성 들여 입력하고 업로드했다. 학위에 대한 검증은 ICAS(International Credential Assessment Service of Canada) 웹사이트에 별도로 신청해서 진행을 해야 했다. 성적증명서 역시 졸업한 학교에서 직접 ICAS로 송부해야 했기에, 해외우편발송 신청을 하고 비용을 모두 지불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100만 원 넘는 돈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어떤 일도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닫힌 문에 미련을 버리고 열린 문으로 걸어가 보자.

최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쟁취할 수 있는 것들이 눈앞에 있으니 게을러지지 말자.

그리고 이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연결 지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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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survived the weather @Gallery George>



MSF(Médecins Sans Frontières) 국경 없는 의사회에 지원했다.

남편만 work permit이 있고 배우자로 동반비자(Visitor)로는 캐나다에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내가 유학생이 되던지 영주권을 받던지 합법적인 work permit을 받아야만 일을 할 수 있다. 퇴사 후 약속한 한 달을 꼬박 베짱이처럼 놀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과 고민을 해야 했다.

가장 든든했던 내 회사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가 예상하고 계획했던 향후 1,2년은 완벽하게 알 수 없는 미래가 되었다.


바쁜 하루 일과를 보내던 어느 날인가 MSF에 지원해서 다시 개발도상국 현장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아이들 모두 내가 한국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잘 지내주었으니, 6개월 정도 견뎌주지 않을까?

아내요, 엄마인 내가 너무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재정을 축내며 함께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봉사도 하고 소정의 용돈도 모아 올 수 있으면 보탬이 되지 않을까?


지금이 아니면 나는 또 매일 바쁜 일상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나를 보내주세요.

가자지구, 아프리카 분쟁지역으로 지원을 했다.


회사 일로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린 것 같은 지금 과거의 나처럼 머리를 밀어버릴 수는 없으니,

가장 힘든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를 소진하며 다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왕 결심한 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일주일 뒤 인터뷰를 했다.

간호사로는 최근 2년 임상경력이 없기 때문에 불충분하지만, 오랜 경력과 과거 아프리카 파견 경험이 있기에 현지 의료인과 지역사회 보건 교육을 할 보건증진 교육자로 다시 지원해 줄 수 있을지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 포지션은 장기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므로 1년 이상 지원하는 것을 추천했다.


남편은 이 또한 소중한 기회이니 다녀오라고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어떻게 할까?

아직 회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