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g 아저씨와 홍콩
이야기는 19세기, 제국주의의 파도가 거세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42년 홍콩섬을 영국에 넘겨주었고, 이후 야금야금 땅을 더 내주다 1898년에는 신계 지역을 딱 99년 동안만 빌려주기로 약속한다. 사실상 영원히 가질 줄 알았던 영국에게 '99년'이라는 숫자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약속한 1997년이 다가오자,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중국을 찾았다. 영국은 "통치는 우리가 계속할게"라고 제안했지만, 중국의 등소평은 단호했다.
"주권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고 결국 1984년, 두 나라는 중영공동선언에 서명한다.
"땅은 돌려주되, 홍콩의 자유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은 50년간 건드리지 않겠다"는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 원칙이 탄생한 순간이다.
반환 당일, 홍콩 총독 크리스 패튼은 눈물을 글썽이며 영국 국기를 내렸고, 그 자리에는 중국의 오성홍기와 홍콩의 자색꽃(바우히니아) 깃발이 올라갔다. 세계는 '동양의 진주'가 공산주의 국가의 품에서 과연 빛을 잃지 않을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약 27년이 흐른 지금, 홍콩은 약속했던 50년의 반환점을 돌았다.
하지만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홍콩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중국화'되고 있다. "말만 일국양제지, 사실상 일국일제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홍콩의 독특한 색깔이 흐려지고 있다는 우려가 깊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 국민 시위도 일어났고 이는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된 바 있다.
빌딩 매니저인 Wong 아저씨는 홍콩 반환의 격동기에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건너왔다고 한다. "홍콩에는 더 이상 자유도, 희망도 없다"며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읊조리시는 아저씨의 눈가에는 이내 물기가 어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저씨는 중국 자본이 건설한 이 아파트에서 건물을 관리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계신다. 지금은 이렇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첫 만남은 '무섭고 깐깐함' 그 자체였다.
이사 온 다음 날, 아저씨는 다짜고짜 우리를 호출했다. "어떻게 나한테 연락 한 번 없이 이사를 들어올 수 있느냐"며 시작된 추궁은 마치 강력계 형사의 취조 같았다. 이사 과정에서 공동 시설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질 거냐며 화를 내는 모습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리얼터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날짜에 들어왔을 뿐이고, 가구 하나 없이 이민 가방과 백팩만 조금씩 옮겼다고 설명했지만,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그 의심 가득한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날 이후, 까칠한 껍데기 속에 감춰진 아저씨의 진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을 연 아저씨는 이제 우리 가족에게 누구보다 따뜻한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 다만 홍콩에서 교사로 재직하셨던 직업병(?) 때문인지, 한 번 대화가 시작되면 열정적인 역사 수업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홍콩 영화와 민주주의 이슈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꽤 즐거운 청강 시간이지만, 눈치 빠른 아이들은 벌써 아저씨만 보이면 저만치 달아나기 바쁘다.
2000년대 초반, 내가 자주 여행하며 사랑했던 그 홍콩의 활기찬 공기가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는 아저씨의 말에 내심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때 누군가의 스승이었고 한 나라의 주인이었을 아저씨는, 이제 낯선 땅의 오래된 아파트 복도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역사를 전하고 계신다.
나도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지 않고 영원히 이전의 홍콩이었으면 좋겠다.
Fire Alarm
갑자기 울려 퍼진 화재 경보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막 돌아온 오후 3시 무렵이었다. 경보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지르며 크고 작은 소방차들이 아파트 입구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캐나다 소방차의 사이렌은 한국보다 체감상 50배는 더 큰 데시벨로 심장을 울리는 것 같았다.
소란스러운 사이렌 소리에 심박수가 치솟았고, '정말 큰 불이 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어디선가 전선이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도 같았다. 평소 이웃 마주칠 일 없던 고요한 복도였지만, 현관문을 열자 11층 주민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서둘러 비상계단을 향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수건에 물을 적셔 코와 입을 막고, 제일 좋아하는 인형들을 가방이 터져라 눌러 담아 품에 안은 채 나타났다. 내 손을 꼭 쥔 채 계단을 내려가며 "엄마, 불나서 건물이 무너지면 어떡해?"라며 요란을 떠는 아이들. "별일 아닐 거야, 걱정 마"라며 아이들을 다독였지만, 사실 나 역시 무서운 마음을 누르며 한 계단 한 계단 발을 내디뎠다. '진짜 큰불이라면 중요한 서류나 물건이라도 챙겨 나왔어야 했나' 하는 뒤늦은 후회도 머릿속을 스쳤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풍경이 생경했다. 대피하지 않은 몇몇 주민은 베란다에 나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슨 일인지 몸짓으로 물었고, 대피한 우리 역시 영문을 모른 채 소방관들의 동선을 살피기 바빴다. 빌딩 매니저인 Wong 아저씨는 소방관들과 소통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셨다. 우리 가족처럼 당황한 초보 대피자들과 달리, 오래 산 이웃들은 익숙한 훈련인 양 여유롭게 반려견과 잔디밭을 거닐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이 기회에 옆집에 누가 사는지 확인하고, 얼굴만 알던 주민들과 통성명을 나누는 나름 즐거운 시간이 이어진 것이다. 코퀴틀람에 비해 중국인 비율이 높긴 했지만,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니 중국, 홍콩, 한국 등 동아시아인부터 이란, 파키스탄, 러시아, 인도까지 인종이 정말 다양했다. 백인 캐나다인도 드물게 보였는데, 그 중에 Mr. Michel 씨는 우리 가족 옆에서 별일 아닐 거라며 어릴 적 겪은 화재 경험담을 재치 있게 들려주어 긴장을 풀어주었다.
다행히 센서 오작동은 아니었지만, 큰 화재도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내 전선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한 시간가량 정밀 점검(Inspection)을 마친 소방관의 브리핑을 듣고서야 다시 집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큰 화재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니 평범한 하루가 어찌나 감사한지 그저 편안한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우리 모두 행복했다.
이 아파트는 오래 되긴 했지만, 작은 위험도 예민하게 감지해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고 감사했다. 특히 그 무더운 날씨에 두꺼운 방화복을 입고 현장을 누빈 소방관들에게 깊은 존경심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도 밤 12시에 한 번, 대낮에 한 번, 지금까지 총 세 번의 알람이 울렸다. 20년 넘은 아파트라 잦은 알람이 번거롭기도 하지만, 매번 감사한 마음으로 이 '실전 같은 대피 훈련'에 기꺼이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