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초경
나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되어서야 초경을 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초경을 시작한 친구들은 반에서 가장 키가 크고 성숙한 아이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그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며 장난을 했다.
“이제 나한테 언니라고 해라.”
겨울방학이 지나고 내 키는 그들보다 7센티미터나 더 자라 어느새 반에서 가장 큰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언니의 초경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가끔 엄마와 언니가 시장에 다녀오면, 언니 손에 든 까만 봉지에 신문지로 둘둘 말린 네모난 물건이 눈에 띄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카스텔라 빵이었다.
어느 날, 그 봉지를 낚아채려다 예민해져 있던 언니에게 한 대 얻어맞고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는 그저 키만 멀대처럼 큰 철없는 아이였다.
엄마와 언니는 왜 그렇게 숨겼는지
나와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언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나는 초경이 시작되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늦은 겨울날, 집에 혼자 있던 날이었다.
갑자기 초경이 시작되었다. 놀란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특유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축하한다"며 생리대가 있는 위치와 간단한 사용법을 설명해 주셨다. 그 축하가 왜 그리 어색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돌이켜 보면 우리 어린 시절의 성교육은 참 단순했고 친구들끼리는 서로 민망해했다.
체육 시간에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만 따로 모아 한두 번 듣는 수업이 전부였고, 집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축하받을 일인지도 실감 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꽤 둔하고 털털한 편이었다.
몸이 2차 성징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하루 다섯 끼를 챙겨 먹으며 남동생과 줄넘기 시합을 하느라 정신이 없이 겨울방학을 보냈었다.
그러는 사이 키는 어느새 170센티미터 가까이 자라 있었고,
중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야 브래지어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보다 늦었지만, 때가 되니 우리 모두는 숙녀가 되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코스트코에서 장을 잔뜩 봐 와 냉장고에 정리하고 있었다.
다음 일주일 동안 어떤 도시락을 싸 줄지 메뉴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엄마! 엄마!!!!”
첫째가 안방 욕실에서 뛰쳐나왔다.
목소리가 너무 크고 다급해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피에 젖은 속옷을 들고 “엄마! 통통이가 생리한 것 같아!”
“뭐라고? 이제 11살인데? 만으로 9살인데?”
첫째 뒤따라 나와 서 있는 둘째가 눈이 동그래져 내 표정을 살폈다.
쓰레기를 정리하던 남편도 놀라 달려왔다.
하던 일은 제쳐두고 살펴보니 정말 생리혈이었다.
그 순간 나와 남편은 너무 놀라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얼른 아이를 살폈다.
둘째는 서울에서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왔으니, 아직 성교육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언니가 초경하는 것을 지켜봐 왔으니 낯설진 않겠지만 적잖이 놀란 눈빛이었다.
일단, 그 순간 아이를 꼭 안아주며 안심을 시켰다.
"깜짝 놀랐겠네, 우리 통통이. 우리 딸 숙녀가 되었네. 엄청 축하할 일이야." 하고 가족 모두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욕실로 데려가 생리대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남편은 "너무 어린데... 이게 정상인가?" 하며 속삭이듯 물었다.
"요즘은 초경이 많이 빨라져서 빠르면 9세부터도 하기는 해"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는
'성조숙증'이 스쳐 지나갔다.
놀란 것은 첫째도 마찬가지였는데,
"엄마, 아직 어린인데 생리해도 되는 거야?" 하며 걱정을 했다.
"괜찮아, 정상이야. 네가 편하게 설명해 주면 더 도움이 될 거야." 하니
기특하게도 방에 데려가 한참을 설명해 준다.
둘째는 언니한테 두세 번 강습을 듣고는 혼자 해보겠다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길래 “엄마가 도와줄까?” 하고 물었다.
그제야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변기에 앉아 생리대 스티커를 떼고도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몰라 살펴보는 모습.
클레이나 종이접기를 하던 그 조막손으로 속옷에 패드를 붙이고는 나를 보며 웃는다.
아직 어린애인데.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짠하고 낯설었다.
출혈 이틀 째가 되니 너무 어지럽다고 소파에 누워 꼼짝을 안 한다.
평소 둘째는 우리 집에서 고기도 젤 많이 먹고 4살 많은 언니보다 힘도 더 세고 재잘재잘 말이 쉬지 않는다. 자기 전까지는 에너지가 넘쳐나는 녀석이 조용하니 이른 초경만큼이나 이상하기 짝이 없다.
"왜? 무서워서 그래?"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 아주아주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뜻이야. 전 세계 모든 여자가 겪는 일이라고."
"엄마... 근데 있잖아."
"응, 왜? "
"언니가 그러는데 생리하면 남자를 멀리해야 된대. 안 그러면 임신할 수가 있대. 근데 아빠가 나를 안아줬어. 어떡하지?"
이건 너무 웃긴데, 녀석의 표정이 세상 진지했다.
"하하하, 그것 때문에 걱정되었구나. 언니말이 일부 맞긴 하는데 아빠가 너를 안아주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 임신을 할 수 있는 접촉은 좀 특별한 방식이야."
이제야 웃어 보이며 한 참을 품에 안겨있었다.
어쩌면 좋으리오. 둘째에게 성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
캐나다로 오기 전부터였지만,
그저 포동포동한 살이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식성이 좋은 둘째의 가슴은 2차 성징이 시작된다는 사인이었나 보다. 캐나다 오고나서부터 햄버거, 피자, 고기, 원래 좋아하던 초콜릿까지 더 쉽게 많은 양을 먹게 되었으니 배가 많이 나왔는데, 거대해진 지방세포들이 결국 성호르몬을 자극해서 빠른 초경을 유도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이유로 초경이 빨리 터졌나 보다 하며 남편과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지, 둘째는 많이 먹은 것이 이유라고 생각했는지, 평소 먹던 양을 반 이상 줄여 먹기 시작했고, 매일 줄넘기 100개를 뛰겠다며 스스로 독하게 맘을 먹었다.
식습관 개선이 우선이었는데, 이른 초경 덕분에 둘째는 놀라울 정도로 초콜릿, 빵, 간식을 단번에 끊어버렸다.
의지가 대단하다 싶다가도 피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럴까 싶다.
뭔가 짠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첫째 초경 때는 양이 별로 많지 않았던 거 같은데, 둘째는 주말 이틀 동안 꽤 많은 양의 출혈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어지럼증이 생겨서 월요일 아침 학교를 결석하고 일찌감치 동네 클리닉을 데려갔다.
클리닉은 감기환자로 사람이 가득했지만, 기다리면 당일 진료(drop in)가 가능했다.
2시간 만에 예진실에 들어갔고, 간호사는 어떻게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만 9세인데, 초경(First period)을 했고 출혈량이 꽤 많다는 것과 어지럼증을 호소해서 확인하고자 왔다고 설명했다. 유럽식 영어 발음의 남자 간호사는 반짝거리는 파란 눈으로 친절하게 아이에게 직접 문진 후 차트에 기록했다.
이후 혈압과 맥박 산소포화도를 모니터 했는데, 혈압이 약간 낮았다. 그리고 그는 이 나이에 초경 시작은 흔한 일이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해 주며, 어지러움증에 대해서는 의사를 만나고 가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만 9세라는 이른 연령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괜찮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의사 역시 초경의 연령에 대해서 문제없다고 하며 어지럼증에 대해서만 피검사만 처방하겠다고 했다.
이 출혈을 멈추도록 하는 예를 들면 호르몬 억제 주사 같은 어떤 약물이나 치료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를 보며 엄마가 키가 크니 아이도 따라서 클 것이라고 걱정 말라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했다.
키나 성장에 관해 묻지 않았는데도,
내가 그것을 걱정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여 모든 답을 선제적으로 해 준 것을 보면 그동안 많은 엄마들이 물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아래 검사항목이 체크된 처방전을 가지고 검사실센터를 찾아가 피검사를 했다.
* Hematology profile 헤모글로빈을 포함한 전혈구 수치확인
* Iron level 철분수치
* TSH, T3, T4갑상선 검사
검사결과는 정확히 이틀 뒤에 모든 항목 '정상'으로 나왔다.
의사가 말한 가장 좋은 시나리오대로 어지럼증은 일시적인 증상이었고, 예상한 날짜 안에 출혈은 멎었다.
출혈이 멈춘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잘 먹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둘째는 이전보다 물도 자주 마시고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더 잘 먹는다.
그리고 키는 잘 클 것이다. 또 작으면 어떠냐?
엄마는 키 커서 좋은 거 잘 모르겠다.
예쁜 여자들은 거의 다 키가 작단다.
그러니 둘째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