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사람
11남매의 10번째 딸로 태어난 엄마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 팔금면이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가 본 외가댁은 이른 아침 출발해서 큰 배를 타고 중간에 작은 통통배를 갈아타고
어둑한 저녁이 다 돼서야 갈 수 있는 머나먼 곳이었다. 아주 어릴 적인데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탈 때 한 사람씩 내려갔는데, 유치원생이던 내가 한 번에 내리기엔 무서워 머뭇하고 있던 그때 뒤에 있던 아저씨가 빨리 가라며 나를 밀었고, 얼결에 점프해서 통통배에 떨어졌는데
그 순간 엄마는 버럭 소리치며 그렇게 밀다가 애가 떨어지면 어떡하냐고 매섭게 따져 물었다.
멋쩍은 아저씨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굽신하셨고, 엄마는 한동안 씩씩대며 나를 엄마 쪽으로 끌어안았다.
남자어른에게 엄마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삼 남매 중에 둘째였던 나는 질투도 많고 늘 엄마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엄마가 어딜 가든 많이 따라다녔는데, 그 순간 엄마 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바다에 빠질 뻔했다는 위험한 순간을 다 잊을 만큼....
평소 말수가 많지 않고 표현이 풍부한 엄마가 아니었기에 한 번씩 안아주던 이 같은 순간은 지금도 기억날 만큼 생생하다.
물론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는 말로 표현 못할 자식 사랑을 조용한 교회 한 구석에 앉아 한결같은 기도로 쏟아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일 년에 두 번, 솜이불을 호창을 뜯어내고 하얗게 세탁을 했다.
그리고 풀을 먹여 빳빳하게 말리고 다시 씌워 꿰매셨다. 엄마가 이불 호창을 가는 날이면 그 뽀송한 느낌이 좋아 이불 위에 벌렁 누워있곤 했다. 귀찮을 법도 한데 엄마는 '아이고 저리 가~' 라며 한 번 말하고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불을 꿰매는 동안 엄마는 '울 엄마는 이렇게 했는데, 난 잘 안되네' 하시며 가끔씩 엄마의 엄마, 아빠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큰 아들 하나 빼고는 줄줄이 딸만 열을 낳은 애국자 외할머니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셨는데, 동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늘 앞장서셨단다. 외갓집 광에는 일 년 내내 할머니가 손수 만든 한과와 잘 부쳐진 전이 끊이지 않았는데, 지나가다 들르는 걸인들에게도 따뜻한 한상을 대접하려는 할머니의 마음이라 했다.
사랑채가 늘 사람들로 차고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지역의 유지셨던, 외할아버지는 그 옛날 180센티의 장신에 중절모와 코트가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신사셨는데, 할아버지를 추억하실 땐 바느질을 멈추고 웃음을 머금으며 생생하게 그리듯이 할아버지의 멋짐을 묘사하시곤 했다.
엄마는 외가댁을 자주 가지 못했다.
외갓집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시댁 시집살이가 고되고, 남편은 권위적이고 독단적이지만 그 시절 대부분의 가장은 그러했기에 책임을 다하고 똑똑한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로 잘 사는 것이 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라 믿었다. 막내딸인 엄마가 육지의 육 남매 장남에게 시집을 오면서 바다 건너 친정집에 가지 못하니 굳이 그 번거로운 이불호창을 갈며 그리움을 달랜 것은 아닐까?
한 번은 어느 저녁이었는데, 엄마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임종 당일 가 볼 수가 없어 어쩔 줄 몰라하며 '엄마'를 부르며 울던 엄마를 신기하게 바라만 보았다. 평소 감정을 티 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날 엄마의 통곡과 눈물은 생경하면서도 어린 나에게도 그 절절함이 전해져 가슴이 아렸다.
그게 어떤 일인지 알리 없는 철없는 우리는 엄마 잃은 엄마를 위로할 줄 몰랐다.
저녁밥을 주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그 뒤로 며칠을 외갓집에 갔던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학교 다녀와서 엄마 옷냄새를 맡고,
잘 때도 엄마 옷을 안고 잤다.
집안 살림을 전혀 못하는 아빠가 냄비에 밥을 하시고 밥과 김치, 소시지로 며칠을 버텼다.
드디어 엄마가 돌아오는 날,
엄마가 오시면 달려가 안겨야지. 엄마 말 잘 들어야지.
설레는 마음으로 엄마를 기다리다 드디어 엄마가 현관 문을 열었을 때....
"엄마아~~~~~~~~~~~~~~~~~~~~~~~~~~~~~~~~~~~~~~~~!!!!" 소리쳤지만
엄마는 집안 꼴이 뭐냐 잔소리를 시작했고 우리 중 누구도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는 놈은 없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그날도 엄마는 이불 호창을 펼쳐 꿰매고 있었는데
재잘재잘 학교 일을 이야기하는데 너무 조용해서 엄마를 봤는데,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불을 꿰매고 있었다. "엄마! 왜 울어?"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맘 편히 우시도록 방을 나왔어야 했는데,
눈치 없는 나는.... 엄마의 눈물이 여전히 낯설던 나는...... 귀찮게 계속 물었다.
"나도 울 엄마 보고 싶어 그런다 왜?"
우리엄마,
엄마는 열이 펄펄 나도 할 일을 다 마치고야 자리에 누웠다.
엄마는 몸이 아파 밤새 끙끙 앓아도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고 있는 엄마였다.
엄마는 명품은 없었지만, 가진 것으로 세련되게 멋을 낼 줄 아는 미인이었다.
엄마는 고함치는 아빠에게 한 번도 대들지 않고 침묵으로 싸움을 조기종료시키는 진정한 승자였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 밥은 제일 먼저 담아 아랫목에 데워두는 집안의 권위를 세우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편안하고 풍족하지 않은 살림이어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아빠의 노고를 인정하는 최고의 아내였다.
엄마는 언니, 동생과 싸우다 편이 없어 꼬장을 부리며 울다 잠든 나를 꼭 안아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가 던지는 말도 안 되는 질문과 살면서 고민하는 세상일들에 늘 성경말씀으로 답을 주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인내의 여인이었다.
인내의 여인이 너무 참고 참다 인생의 첫 병원살이를 중환자실에서 하고 있다.
면회시간 잠깐 만난 엄마는 중환자실 환자 중에 유일하게 의식이 멀쩡한 환자였는데,
나를 보자마자 혀가 아프다며 내밀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본 귀신 박중헌의 까만 혓바닥은 분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산 사람의 혀가 까맣게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는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난 간호사였다.
그냥 간호사가 아니다. 난 응급실 간호사였고, 아프리카에서 별별 환자를 다 봤고 미국 간호사 면허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어렵고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가 뭔지 내 전공과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우 나는 나의 당황스러움이 엄마에게 전달될까 봐 아무렇지 않게 간호사에게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늘 들려주던 시편 23편을 메모해서 엄마 핸드폰에 붙여놓고 말씀 보라고 모두가 기도하고 있다고 손을 잡아주고 나왔다.
중환자실 들어간 지 며칠 만에 엄마가 위중하다고 주치의가 날 찾았던 그날,
엄마가 정말 잘못될까 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달려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엄마는 열흘 만에 일반병실로 옮겨왔고, 주간에는 아빠가 엄마 곁을 지키고
퇴근한 후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내가 엄마 곁을 지켰다.
엄마가 이렇게 아프고 나서 난 처음으로 아빠와 어른 대 어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의 인생을 가엾게 봐달라고
시부모를 20여 년 모시고 두 분 모두 집에서 임종하신 복덩이 며느리로 잘 살아내느라 엄마의 삶은 없었으니
이제부터 아빠가 잘해주시라고.
나 같은 여자 만났으면 아빤 이미 이혼당했다고
처음 며칠은 버릇없이 아빠에게 소리치며 울며 불며 다 아빠 탓이라 해버렸다.
시골집도 다 팔고 엄마 좀 편하게 살게 하라고.
아프면서도 아빠에게 미안해하는 엄마를 어떻게 안심시키고 편하게 할 수 있을까?
남편과 시부모, 자식만 위한 인생을 사느라 자기가 없어진 엄마.
아프면서도 자식에게 짐 되었다고 자책하고, 힘든 남편 고생시킨다고 눈물 훔치는 엄마.
어떻게 하면 엄마가 자신만 생각하게 할까?
아빠도 엄마가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 몰랐으니까,
그동안 무심했던 지난날을 후회하셨다.
처음 아빠의 눈물을 보았다.
'엄마가 잘못되면 아빠가 젤 마음 아프지, 알지 내가 모르겠냐' 하며
소리치는 내게 울먹이시며 말했다.
나이 40이 넘어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큰 산처럼 견고해 보이기만 하던 엄마, 아빠가 이렇게나 약해지셨다.
상반기엔 아빠가 암 수술을, 하반기엔 엄마가 패혈증을
둘 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40대는 내 가정, 자식 그리고 부모님의 에피소드로 바람 잘 날이 없어 불혹인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