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의 의리를 뒤로한 날의 기록
약간 지대가 높은 우리 집은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길에서 들어오는 쭉 뻗은 등굣길 끝에 위치한 빌라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시세보다 훨씬 싸서 고민 없이 결정하고 오게 된 집이다.
햇볕도 잘 들고 통풍도 잘 되고 뒤에 산이 있어 공기도 맑고 새소리도 들린다. 게다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한 참 잘 지어진 오래된 빌라다.
등, 하교 시간 아이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들도 반갑고 활기찬 생활의 소리라서 즐겁다.
그 시간 외엔 주변이 조용해서 매우 만족하며 살고 있다.
명품 아파트 부럽지 않은 우리들의 스위트 홈이다.
집에서 나와 길 위에 서면
저 멀리 최소 700m까지 확트여 있어 누가 온다고 하면 베란다에 내다 보면 어디쯤인지 다 보인다.
이렇게 뻗은 길 위에 카페만 다섯 개가 넘는데,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모퉁이 카페가 있고, 조금 지나면 놀이터가 있다. 그 이후로 최근에 오픈한 소금빵과 함께 하는 카페, 에그타르트와 함께 하는 카페, 그리고 더 지나 큰길에 가까운 쪽에 오래된 프랜차이즈 카페 세 곳이 줄줄이 있다.
그야말로 카페 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 집 오는 길에는 카페가 많아지고 있다.
환경이 이러다 보니 이 나이에는 건강을 생각해 끊거나 줄여간다는 커피를
새삼스럽게 설레는 마음으로 입문하였다.
남들 커피 마실 때 우유 마시고, 주스 마시던 내가
하루 한 잔을 마시더라도 제대로 골라서 마시는 행복을 누린다.
우리 집 바로 앞 모퉁이 카페는
한 면이 통유리창인데 햇살이 환하게 들어 따스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다소 칙칙할 수 있는 빌라들 사이에 센스 있게 잘 자리 잡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엔틱 한 필름사진들이 천장을 가로질러 꽂혀있고
산타를 기다리는 벽난로가 연상되는 로스팅 기계, 그 옆엔 사장님이 주로 앉아 책을 읽곤 하는 캠핑의자 그리고 옆에 놓인 거대한 원두 자루들이 분위기를 더 잘 살린다.
하루에 한 번 솔솔 풍기는 원두 볶는 냄새가 너무 좋아 어느새 4년 차 단골이 되었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커피가 진짜 진하고 맛있다.
아무리 인테리어가 훌륭해도 맛이 중요하니까......
5성급 호텔에서 바리스타를 꽤 오래 했었다는 사장님의 커피는 가격을 더 올려 받아도 되겠다 싶은 퀄리티다. 카페 사장님은 원두를 직접 로스팅하고 콜드브루도 내리고 원두도 판매한다.
커피 하수일 적엔 한 모금만 마셔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두근했었는데, 이제는 내 심장을 다독이고 적응시켜 이제는 아껴 마시는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동네 어딜 가도 그 진함과 맛은 이 집 커피만 못하다.
하지만, 커피 맛을 알게 된 요즘의 나는 참으로 흔들리는 갈대 같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는 하이에나 같다.
우연히 아이들과 들른 소금빵과 커피를 같이 파는 곳의 커피도 맛있고, 에그타르트 집 역시 맛있다.
프랜차이즈 커피보다 동네 커피숍을 더 선호하는 나는 볼일을 보러 나갈 때면 그 김에 새로 오픈한 곳은 꼭 들러 시그니처 커피를 마시곤 한다.
이렇게 전국 커피숍들의 수준과 퀄리티가 평준화된다면 소비자인 나는 매일 만족할 커피타임을 누리게 되어 행복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편에 단골 집 커피를 두고 다른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사장님은 한 번씩 갈 때마다 코로나 19 이후 장사가 너무 안된다고 몇십 분씩 신세한탄을 늘어놓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뿐 아니라, 우후죽순처럼 그 사이 짧은 시일 내 기발한 콘셉트로 생겨나는 새로운 커피숍들에 걱정이 될 것이다.
이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전세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재판을 받으러 다니시고, 전세사기를 당한 것은 다 아내 때문이라며 그 배신감까지 카페에 오는 모든 이들에게 쏟아내었다. 지금 카페 건물 주가 내년에 나가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너무 아쉬워 눈물이 날 만큼 아쉬워했을 정도다.
그때부터였을까 힘내라며 한 마디씩 건네던 동네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사장님의 응원단이 되어갔다.
사장님의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힘내라는 말을 직접 전한 적은 없지만, 그 무렵 한 동안은 매일 커피를 마시러 갔다.
주말에도 과일청을 담그고 오로지 카페만 생각하는 부지런한 사장님이 갈수록 야위어가는 모습도 짠하고,
툭툭 던지는 힘든 가정사도 짠하고, 오며 가며 카페가 한 산 하면 걱정이 되었다.
손님이 많은 날은 다행이다 하며 마음 편히 지나가게 되었으니 알게 모르게 동네에서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지켜줘야 하는 카페가 된 것이다.
그런 카페다. 그 카페는
근데 하루는.
그날은 에그타르트 가게 커피가 생각났다.
옛 정서가 있어서 그런가, 이런 것도 의리가 있어서 그런가?
'그냥 모퉁이 카페 가자. 아니야 나는 왜 소비자의 권리를 맘 편히 누리지 못하고 미안해하는 걸까?'
고민의 고민이 계속된 끝에 일단 집을 나섰다.
아무렇지 않게 단골 카페를 성공적으로 지나쳤는데, 손님이 없는 빈 테이블들이 눈이 들어와 애써 외면하며 정면을 보며 빠른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경보로 도착했는데, 하필 소금빵 카페도 에그타르트 카페도 휴업이었다.
너무 아쉬운 마음 안고 돌아오는데 오늘만큼은 다른 집 커피를 마시고 싶어 어떻게든 다시 뒤돌아 나가고 싶었다. 때마침 집에서 내려오는 출근하는 남편 차가 보여 냉큼 올라타 다시 큰길 쪽으로 내려갔다.
이런 고민을 한 나를 보며 남편은 그냥 마시고 싶은 걸 마시라며 나답지 않게 왜 그러냐며 웃었다.
결국은 프랜차이즈 카페 P에서 라테를 시켰다.
아까 차에서 웃으며 집에 들고 갈 일을 걱정하는 나에게 남편이 준 아이디어는 기똥찼다.
놀이터 앞에서 왼쪽으로 두 개 블록을 지나 직진 두 블록 거기서 우회전하면 단골카페를 지난 다음 블록이 나오니, 바로 집으로 쏙 들어가면 된다는 계산.
유후~!!
사실 그 단골카페 문 앞에 나와 놀이터를 쳐다보면
놀이터 앞두고 좌회전하는 내가 보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 나와서 그렇게 볼리가 없다는 것.
근데 나오면 어떡하지?
일단 떨리는 마음 안고 커피 향 솔솔 나는 라테를 손에 들고 놀이터 앞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거기서 왼쪽으로 돌아서려는데 혹시 하고 쳐다본 저 멀리 카페 문 앞.
휴 ~ 다행이다. 아무도 안 나와 있다.
문이라도 열렸으면 보였을지 모른다. 키가 큰 내가 눈에 띄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누가 보면 도망자인 줄... 주변을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쉭쉭- 휙휙- 두근두근
그렇게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왔다.
쏙~!
단골카페 사장님이
다른 가게 커피를 들고 가는 나를 볼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임무를 완수한 007 작전 내지는 미션임파서블의 요원 같은 심정으로 P카페 라테를 만끽했다.
사장님, 미안해요.
늘 응원합니다.
문전성시를 이루어라 모퉁이 카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