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힙" 현상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by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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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주위 상황에 초연한 태도가 그것이다. 그들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한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뿐이다. 마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책을 읽는 목적과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몽글몽글한 시의 세계에 푹 빠진 사람도 있고, 핍진한 소설 한줄 한줄에 눈을 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에세이를 읽으며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하고, 직접적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서를 읽으며 지식과 정보를 쌓는다. 독자들은 자신의 독서 취향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기도 한다.


요즘은 책의 진입장벽을 뚫고, 책과 진심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 선택의 근거에는 기본적으로 “책은 멋진 것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렇게 책을 멋지다고 보는 사회적 현상은 “텍스트힙”이라고 불린다. 텍스트힙은 글을 의미하는 텍스트(text)와 멋지고 개성 있는 것을 의미하는 속어인 힙(hip)이 결합한 단어이다. 특히 2·30대 사이에서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최신 유행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힙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반짝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텍스트힙이라는 용어는 최근에 발생한 것이지만, 텍스트를 ‘멋지다’고 보는 인식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로부터 글자를 익히고 사용하는 능력은 사회 최고위층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한국에서 한자를 쓰는 양반들이 그러했고,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택받은 1%가 아닌 대부분의 백성들은 까막눈에 불과했다. 이러한 정보적 불평등은 사회적 불평등을 완성하고 합리화하는 도구였다.


그러다 보니 일반 양민이건 천민이건, 모두 글깨나 읽는 양반을 선망했다. 양반들의 허례허식을 비웃고 얕보면서도,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 그리고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가 되어 나랏일을 맡아볼 수 있는 체계화된 지식은, 몇 마디 말로써 전달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오직 축적된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인 글을 통해야만 함을 백성들도 알고 있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글 쓰는 능력은 나랏일에 필수적이었다. 그 당시 글을 ‘힙하다’고 보지 않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없지 않았을까.


글을 멋지다고 보는 풍조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책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성인 연간독서율이 86%를 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SNS의 범람으로 책을 읽는 비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매년 성인 연간독서율은 급락했고,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23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서는 43%를 기록해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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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2023년부터 SNS에 독서 인증샷을 찍어 공유하는 현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과시용 독서라는 태그로 글을 올리며 표지가 예쁜 책이나 두꺼운 ‘벽돌책’ 등의 사진을 공유했다. 시집이나 에세이를 필사해 올리면서 책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했다. 자신만의 개성이 넘치게 책 표지나 가방을 꾸미는 ‘책꾸’ 현상도 나타났다. 10대와 20대들이 서로 감명 깊게 본 책을 공유하면서 정대건 작가의 <급류>와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 등이 출판계의 핫이슈로 떠오르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독서와, 지금껏 독서의 적으로만 여겨졌던 SNS와의 결합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이는 꽤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텍스트힙’ 현상은 2024년 10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수상 직후 한 달간 서점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이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었다. 또한 한강 작가의 수상을 통해 “한국문학에는 숨어있는 훌륭한 작가들이 많다”는 인식이 퍼졌다. 독자들이 다른 작가의 책까지 손을 뻗으면서, 수상 이후 한 달간 서점 전체 판매량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이러한 흐름은 2025년까지 계속 이어졌고, 6월 중순 개최된 서울국제도서전의 티켓은 조기매진되었다. 서울국제도서전의 70년 역사 동안 가장 큰 관심을 받았다는 평이 나올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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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텍스트힙’ 현상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까? 출판사 관계자들은 일견 부정적이면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듯하다. 우선 그들은 책이 ‘힙하다’는 인식은, 애초에 책을 읽는 행위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꼽는다. 모두가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사람은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출판사 관계자들은 책의 매력을 아는 사람들이 전보다 늘어난 것에 가능성을 걸고 있다.


AI와의 연계성도 따져봐야 할 문제다. AI가 독서의 가장 큰 적이 될지, 아니면 SNS와 마찬가지로 독서의 친구가 될지는 아직 정확히 알기 힘들다. 만약 전자책을 보거나, 종이책을 보더라도 AI를 활용한 플랫폼에 독서 기록을 남기는 독자라면, AI가 그 기록들을 통해 더욱 개인화된 맞춤 독서 목록을 제안할 것은 분명하다. 또한 책을 추천하는 것을 넘어서, 책을 읽는 단계에서도 AI는 도움을 줄 수 있다. 만약 AI가 더 발전하면, 전자책 텍스트 자체를 사용자에 맞게 간략화하거나 재구성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가정을 해본다.


앞서 텍스트힙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반짝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고 언급했었다. 텍스트힙은 어쩌면 문자의 발명과 동시에 발생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것이 바로 텍스트힙일 수 있다. 오늘날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전자책이 오디오북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책의 본질만큼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어쩌면 책은, 그 깊은 역사 동안 인류의 정신과 영혼에 깊게 박혀버린 무엇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을 뽑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작은 아씨들>이나 <톰 소여의 모험> 같은 세계문학을 종종 읽곤 했었다. 그때마다 매우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우리는 어른이 되어 먹고살기에 바쁜 지경에 이르렀지만, 생각해 보면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책장을 넘기며 읽어줄 독자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숏폼 영상의 홍수에 지쳐있는 우리에게, 가끔은 한가롭게 책 읽을 시간을 선물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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