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는 쌓이지만 가사는 휘발된다(下)
가사 노동의 꽃, 요리도 예외는 아니다.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인터넷에 있는 수 만 가지 레시피 중 가장 믿음직스런 하나를 고르고, 재료를 손질하고, 볶고 찌고 데우고…이 복잡 다단한 단계를 거친 결과물은 가족의 젓가락질 몇 번이면 사라진다. 더 지독한 건 끼니 때가 오면 이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메뉴를 정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무궁무진한 레시피 중에서 내가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쉬우면서 집에 재료가 준비돼 있고, 남편의 취향까지 맞는 걸 고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다. 어릴 때 저녁마다 ‘뭐 먹고 싶냐’고 묻던 엄마에게 ‘또 그 질문이냐’며 핀잔을 주곤 했었는데, 주부가 되고서야 엄마의 고충이 이해가 갔다. 아침을 먹지 않는 남편 덕에 저녁 메뉴만 고민하면 되는 나도 이렇게 지겨운데, 아침과 자식 셋 점심 도시락, 저녁까지 하루 세끼 식사를 오롯이 혼자 정해야 했던 엄마는 오죽했을까 싶다.
‘미움 받을 용기’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의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도 ‘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란 책에서 나와 같은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일하는 아내를 대신해 거의 평생 집안일을 맡아 온 ‘베테랑’ 주부다.
“음식 만들기는 지금도 여전히 어렵고, 메뉴를 생각해 내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 메뉴를 정해 주면 장보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장보기 전에 메모를 건네준 적도 있다. 오늘은 뭘 만들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신나서 종이를 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뭐든 많이’…”
이 대목을 읽고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리 고민해도 마땅한 메뉴가 생각나지 않던 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적이 있다. '차라리 기사 아이템을 내고 말지…' 매일 아침 새로운 기사거리를 가져와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다 회사를 나왔는데, 퇴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고작 이만한 일에 떠나온 곳을 기웃거리는지. 내 자신이 참 형편없게 느껴졌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한 초(!)고학력자인 그도 고작 메뉴 때매 괴롭다니, 내가 엄살 부린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혼자서 묵묵히 살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직장 다닐 때와 비교를 하게 된다. 그때마다 가사 노동의 휘발성이 못내 서운하다. 아무리 나를 피말리게 했던 업무라도 어딘 가엔 그 흔적이 남고, 그 흔적들이 모여 내 커리어를 구성한다. 그렇게 땀과 눈물로 완성된 커리어는 내게 새로운 일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커리어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은 다른 일로 가는 계단이 되어주지 못한다. 퇴근이 없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가사 노동의 단점보다 나는 그 점이 더 아쉽다. 직장 생활이나 가사 노동이나 끝도 없이 굴러 내려오는 '시지프스의 바위'같다는 면에선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겠지만, 그나마 직장 생활은 ‘다른 바위, 운 좋으면 더 가벼운 바위’가 내려 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이다.
얼마 전 500ml 맥주캔을 떨어트려 엄지 발가락에 타박상을 입었다. 의사가 1주일 동안은 웬만하면 움직이지 말라기에 한 동안 집안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다. 거실에 맥주 캔 다섯 개(아파도 술은 먹어야 하니까), 화장실엔 다 쓴 휴지심 4개, 집안 곳곳에 뭉쳐 돌아다니는 머리카락 500개까지 집안 꼴이 순식간에 엉망이됐다.
재밌는 건,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던 내 노동이 그제서야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단 며칠만 하지 않아도 집안은 불결하고, 불편해진다. 당연하게만 여기던 집안 상태가 주부의 가사 노동으로 유지된 거였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그제야 증명된다. 가사노동은 안 해야 그 존재가 드러난다.
그래서 안 그래도 더운 이번 여름, 집안 일을 최대한 안 할 생각이다. 원체도 열심히 안했지만, 더 격렬하게 안 할 생각이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가사 노동에 있어 완벽주의, 열심 같은 단어는 '미덕'이 아니라 '미련'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여름 태업을 하겠다는 변명이 아무래도 너무 길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