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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Jul 08. 2017

전업주부로 살아보니

재능의 배신(下) 

 막 직업의 세계에 발을 디디려하는 스물 다섯 나에게 그의 '직업론'은 김빠지는 말이었다. 일을 통해 성숙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적당히' 해도 잘 하는 일에서 어떤 성장을 기대 할 수 있을까 의심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이어서  일종의 '낭만주의' 가 있었던 것 같다. 일에서 겪는 희노애락이 내 인생의 깊이와 풍미를 더해줄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내게 80%란 수치는 권태와 정체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능력의 80%는 커녕 120~130%를 쏟아부어도 잘 할 수 없는 일을 수년간 하고 보니 탁 선생님의 직업론은 '인생의 진리'에 가까웠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직업에서 매일 실패를 맛본다면, 그것도 그냥 실패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맛보는 농도 진한 TOP급 실패라면, 그 사람은 멀쩡할 수가 없다. 일에서의 실패가 순식간에 일상까지 번져 나가기 때문이다.  

 맥심 TOP 광고 캡처. 대충하고 맛보는 실패가 그냥 커피라면, 최선을 다하고 맛보는 실패는 TOP다..

 상사에게 잔뜩 혼나고 집에 돌아와 마트에서 산 양념된 제육볶음을 뒤적일 때, 쌈 채소를 씻을 때, 그렇게 후다닥 차린 저녁을 먹을 때, 나는 자주 남편이 아닌 내 안에 남아 있는 상사의 독설과 마주 앉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 재워져 필요 이상으로 달콤해진 고기를 씹으면서 맘 속으로는 낮에 못한 변명과 자책을 번갈아 했다. 단순히 일에 재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쉽게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더 이상 재능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면 대충해도 그럭저럭 잘해낼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봤다. 내 능력의 절반만 써도 잘 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일이 눈에 들어왔다. 살림이었다. 아이 없이 부부만 사는 집의 살림은 그리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특별한 기술이나 요령 없어도 부지런하기만 하면 거의 빈틈 없이 해낼 수 있었고, 실패 해봤자 요리를 살짝 태우거나 니트가 줄어드는 정도였다. 실패에 노이로제가 걸린 나는 이런 진입장벽이 낮은 일이 절실했다. 무엇보다 살림은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120% 최선을 다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사표를 내고,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 한 선배와 짧게 인사를 나눴다. 한때 내 롤 모델이었던 그에게 만큼은 꾸며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재능 없는 일을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담담하게 털어 놨다. 그는 토끼눈을 하고 반문했다. "아니, 누군들 재능있니? 그리고, 네가 재능이 없으면 누가 재능이 있겠니?" 

 그 말을 듣는데, 어쩌면 먼저 배신을 한 건 재능이 아니라 내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있던 재능이 갑자기 사라져 나를 곤경에 빠트린 게 아니라,  한 줌의 재능이라도 전적으로 지지해줬던 내 마음이 먼저 식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재능이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마음까지 포괄하는 개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시절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나를 벅차오르게 했던 회사를 등졌다. 지독했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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