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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Jul 08. 2017

전업주부로 살아보니

재능의 배신(上)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 '기자'와 나의 궁합은. 일단 적성에 맞았다. 어릴 때부터 쌈닭 기질이 있던 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학보사 활동을 했다. 불평 불만 박사의 눈에 이 사회는 고쳐야 할 것 투성이었다. 혼자서 궁시렁 대지 않고 지면이나 방송같은 채널을 통해 좀 '있어 보이게' 지적질하는 일이 좋았다. 

 '운명'도 우릴 갈라 놓지 못했다. 진로 상담을 한답시고 만났던 역술가나 점쟁이들은 하나같이 내게 기자를 하라고 권했다.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하는 일이 내 사주에 잘 맞는다는 이유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재능이었는데, 별 준비없이 한국언론재단 예비언론인과정(말하자면 언론사 입사 준비 학원인데, 시험봐서 수강생을 뽑았다)에 합격한 것을 보면 재능이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일찌감치 '기자'를 직업으로 정했다. 초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까지 한 셈이었다.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캡처.  여태 만났던 역술들은 내게 "기자가 딱"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기자와 내가 찰떡궁합이라는 믿음은 기자가 되고부터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는데 성과가 없었다.  타사 기자가 나를 '기자실에서 통화 제일 많이 하는 여기자'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을 했는데, 다음 날 조간신문을 보면 내가 쓴 기사가 돋보이기는 커녕 밋밋했다. 내 성에 차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그랬다. 기사를 전송하고 나면 5분도 안 돼 회사번호가 찍힌 전화가 걸려왔다. 데스크의 긴 한숨으로 시작된 통화는 '다시 써봐'로 끝나곤 했다. 매일 100m 육상선수처럼 전력질주를 하는데 눈을 떠보면 러닝머신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못하는 내 자신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때부터 재능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성과가 없는 건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재능이란,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는 소설가 김중혁의 재능론을 누구보다 소중히 부적처럼 품고 살던 나였다. 하지만 나보다 두 세살 어린데도, 나만큼 자주 취재원을 만나지 않(아 보이)고, 나보다 고심하지 않(아 보이)는데도 좋은 기사를 턱턱 써내는 몇몇 동기들을 보면 재능은 애초에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심증이 굳어졌다.  

 재능이 없다고 확신하는 일을 매일, 그것도 하루 열몇시간씩 해야 하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무엇보다 자꾸 일에 겁을 먹었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일인데도 '내가 이 일을 실수 없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떻게 하면 혼나지 않을까'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그려보느라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무척 더뎠다. 그제야 어른들이 왜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잘하는 일'을 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한 방에 붙여 내 재능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을 심어준 문제의 '예비언론인과정'에서 철학자 탁석산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다. 탁 선생님이 4개월 동안 목에 핏대 세워가며 가르친 건 '논술문 잘 쓰는 법'이었는데, 정작 머릿속에 남은 건 뒷풀이에서 들었던 한 마디였다. 

 "자기 능력의 80%만 써도 잘 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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