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퇴사하고 계절을 찾았다(下)
혀끝으로 온 계절은 풍경으로 완성된다. 집 앞에 경의선 숲길이 있다. 요가원을 오가며 매일 1시간 정도 이 길을 걷곤 한다. 이 길을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에겐 결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변화를, '산책하는' 나는 발견할 수 있다. 그럴때면 마치 남들은 찾지 못하는 고난이도 틀림 그림을 나만 발견한 것처럼 의기양양해지곤 한다.
틀린 그림 찾기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가 클라이막스다. 헐벗은 나무에 옅은 노란색의 목련 몽우리가 하나 둘 맺히더니 다음날 와보면 어느덧 큼직한 목련이 피어있다. 그러고나면 흰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야속하게도 딱 사흘이면 꽃잎이 떨어진다. 일할 때는 거의 매년 "올해는 벚꽃 구경도 못했다"고 푸념하며 남친(남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곤 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폈다 지니 주말에만 만날 수 있던 우리가 벚꽃을 놓치는 건 당연한 거였다. 벚꽃이 떠난 자리는 수수꽃다리, 라일락, 철쭉 같은 선수들이 섭섭지 않게 메워준다. 바람과 햇볕도 티 안나게 살짝씩 변하면서 산책하는 재미를 거든다. 주부가 되기 전엔 그냥 '꽃'으로 뭉뚱그려 불렀던 꽃의 개별적 이름, 꽃이 피는 순서와 시기와 과정을 알게 되는 즐거움은 내게 '성취와는 무관한 행복감'을 선사했다.
책 '퇴사하겠습니다'(엘리)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퇴사 후 제철음식과 찰나의 풍경을 얻었다"고 했다. 이 구절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퇴사하고 나는 계절을 찾았다. 그 말은 한 달 도시가스비가 1500원 나올 정도로 요리를 싫어 했던 내가 저렴하고 맛 좋은 제철음식으로 상을 차려 먹는 즐거움에 눈 떴다는 뜻이다. 거울을 보며 줄어가는 머리카락과 늘어나는 주름을 세기 바빴던 내가 자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통해 나는 일할 땐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행복감을 맛봤다. 쾌락인지 행복인지 잘 구별되지 않고, 언제나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 더 큰 갈증을 불러 일으키던 성취감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이제, 내 앞에 전업주부로는 처음 맞는 여름이 성큼 다가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