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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Jun 15. 2017

전업주부로 살아보니

2. 나는 퇴사하고 계절을 찾았다(下)

틀린 그림 찾기의 재미

혀끝으로 온 계절은 풍경으로 완성된다. 집 앞에 경의선 숲길이 있다. 요가원을 오가며 매일 1시간 정도 이 길을 걷곤 한다. 이 길을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에겐 결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변화를, '산책하는' 나는 발견할 수 있다. 그럴때면 마치 남들은 찾지 못하는 고난이도 틀림 그림을 나만 발견한 것처럼 의기양양해지곤 한다. 

틀린 그림  찾기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가 클라이막스다. 헐벗은 나무에 옅은 노란색의 목련 몽우리가 하나 둘 맺히더니 다음날 와보면 어느덧 큼직한 목련이 피어있다. 그러고나면 흰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야속하게도 딱 사흘이면 꽃잎이 떨어진다. 일할 때는 거의 매년 "올해는 벚꽃 구경도 못했다"고 푸념하며 남친(남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곤 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폈다 지니 주말에만 만날 수 있던 우리가 벚꽃을 놓치는 건 당연한 거였다. 벚꽃이 떠난 자리는 수수꽃다리, 라일락, 철쭉 같은 선수들이 섭섭지 않게 메워준다. 바람과 햇볕도 티 안나게 살짝씩 변하면서 산책하는 재미를 거든다. 주부가 되기 전엔 그냥 '꽃'으로 뭉뚱그려 불렀던 꽃의 개별적 이름, 꽃이 피는 순서와 시기와 과정을 알게 되는 즐거움은 내게 '성취와는 무관한 행복감'을 선사했다.   

6월의 나무는 이런 색이었다. 이달 초 찾은 과천서울랜드, 이름 모를 호수의 풍경   

계절과 친해지니 행복해졌다

책 '퇴사하겠습니다'(엘리)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퇴사 후 제철음식과 찰나의 풍경을 얻었다"고 했다. 이 구절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퇴사하고 나는 계절을 찾았다. 그 말은 한 달 도시가스비가 1500원 나올 정도로 요리를 싫어 했던 내가 저렴하고 맛 좋은 제철음식으로 상을 차려 먹는 즐거움에 눈 떴다는 뜻이다. 거울을 보며 줄어가는 머리카락과 늘어나는 주름을 세기 바빴던 내가 자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통해 나는 일할 땐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행복감을 맛봤다. 쾌락인지 행복인지 잘 구별되지 않고, 언제나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 더 큰 갈증을 불러 일으키던 성취감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이제, 내 앞에 전업주부로는 처음 맞는 여름이 성큼 다가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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