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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Jun 15. 2017

전업주부로 살아보니

2. 나는 퇴사하고 계절을 찾았다(上)

나는 퇴사하고 계절을 찾았다

멋 좀 부린다는 여자들이 너도나도 트렌치 코트를 꺼내 입는 4월, 겨울용 파카를 입고 길바닥에서 울던 한 여자가 있었다. 따가운 봄볕에 겨드랑이가 흠뻑 젖은 줄도 모르고, 자기 몸에서 꼬리꼬리한 노숙자 냄새가 나는 줄도 몰랐던 반쯤 정신 나간 여자. 그녀는 나였다.

2013년 봄을 떠올리면 그날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 나는 정치 성향이 완전 다른 언론사 두 곳의 실무평가를 앞두고 있었다. 백수 8개월째. 체크카드에 남은 돈은 0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고, 퇴사할 땐 넘쳤던 자신감도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받은 언론사 두 곳의 필기 전형 합격 통보는 내 인생 마지막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언론사 입사시험에서 필기전형을 통과했단 건 최종 합격의 8부 능선을 넘었다는 뜻. 나는 절대 이 줄을 놓치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실무평가를 치렀다.

"그러고 시험봤어?" 시험을 치르고 집에 왔는데 마중나온 엄마와 쌍둥이가 경악을 했다. 더위 잘 타는 이들은 반팔도 입을 날씨에 겨울용 검정 오리털 파카를 입고 하루 종일 뛰어 다닌 거냐고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좀 더웠던 것 같고,  어디서 계속 노숙자 냄새가 났던 것 같다. 그건 남이 아닌 내게서 나는 악취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봄이 왔었구나.' 여유가 없으면 계절도 증발했다.  


                    매년 혹 해서 질러놓고 정작 계절을 못 맞춰 몇 번 입지도 못한 트렌치 코트. 주부가 되

                    고 본전 뽑았다.


 절박했던 덕분인지 나는 합격했다. 그러나 계절 없는 삶은 그 후로 4년 동안 이어졌다. 유달리 추위를 타는 나는 자주 계절을 앞서거나 뒤쳐졌다. 역시 트렌치코트의 계절인 10월에 털 달린 무스탕을 입고 나타나 동기들에게 놀림을 받았고, 봄이 오고도 남은 4월에도 모직 코트를 벗지 못했다.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과제는 매일 버거웠고, 이 과제를 어떻게 잘 해낼까 고민하느라 계절을 감지 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매일 극도로 긴장한 탓에 여름이든 겨울이든 항상 으슬으슬 추웠다. 그러다 겨우 남들이 입은 옷차림을 보고서야 계절이 바뀐 걸 알아채곤 했다. 비중없는 엑스트라처럼, 계절은 내게 존재감이 없었다.

계절은 혀 끝에서 온다

그랬던 내가 주부가 되니 달라졌다. 계절은 혀로, 눈으로, 피부로, 돈으로 '시그널(!)' 을 보내왔다. 꼭 교외로 나가지 않아도, 재래시장을 찾지 않아도, 마트만 가면 무신경한 내게도 잘도 계절이 찾아왔다. 

다이어트 하는 여자처럼 비쩍 말랐던 홍합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가을이 왔다는 신호다. 한 동안 마트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숨 죽였던 굴이 짜잔 하고 마트 전단 1면에 등장하면 어느 덧 가을이 퇴장하고 겨울이 입장했다는 의미다. 겨울 굴은 어찌나 향기로운지, 전기 밥솥에 굴밥을 하고 나면 온 집안에 굴 향기가 퍼지는데, 이걸 응용해 '굴 디퓨저'라도 만들고 싶을 정도로 진한 바다 내음이 난다.  

무는 또 어떤가. 겨울이면 희고 매끈하고 통통한 무가 한 개에 500~1000원에 파는데, '무 다리' 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을 한 대 쥐어 박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다.  부드럽게 입에 퍼지는 단맛은 말할 것도 없다. 

한 개에 2580원까지 하던 콧대 높은 애호박이 500원이 되면 드디어 봄이 왔다는 신호다. 마트에서 양파를 샀는데 잘라보니 군데군데 썪어 있다면 눈 깜짝하면 여름이 온다는 뜻이다. 저장 식품인 양파는 초여름이 제철인데 그 직전인 4~5월이 가장 상태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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