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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Aug 14. 2017

그라운드를 떠나는 여자들을 보며

전업주부로 살아보니 

지난주 '뽑히는 글쓰기' 저자 강연회를 했다. 강의를 끝마치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집에 간 줄 알았던 독자가 강의실 뒷문을 빼꼼히 열더니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강의실 맨 앞 줄에 앉아 단 한 차례도 졸지 않고 내 강의를 들어줬던 고마운 여성 독자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건넸다. "저, 글쓰기에 관한 질문은 아닌데…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20대 후반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녀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걸 물었다. 


"기자가 많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저한텐 일만큼이나 가정도 중요하거든요. 일하면서 가정도 챙길 수 있을까요?" 

이런 걸 기습이라고 하나. 책이나 강의에서 단 한 차례도 회사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내 히스토리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가장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에겐 재능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덧붙였다.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들어갔는데, 얼마 일하지도 못하고 금방 그만두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요. 정말 억울했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라고 답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소 뻔한 답변을 하고 강의실을 서둘러 나왔다. 

 그녀의 질문은 바다 건너 삿포로까지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다. 강연회 다음 날 남편과 일본 홋카이도로 휴가를 갔다. 비행기 안에서 계속 그녀 생각이 났다. 처음엔 그녀가 대견했다. 그 나이 때 나는 내가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문제로 고민하게 될 줄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코 앞에 닥친 문제, 그러니까 기자가 되는 일에만 몰두했다. 결혼이나 출산 같은 건 마치 1990년에 밀레니엄을 떠올리는 것처럼 막연히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그녀는 아니었다. 사회에 진입하기도 전에 앞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이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지 침착하게 탐색했다. 결혼 후 일의 지속가능성까지 꼼꼼하게 따져봤다. 진짜 고민이 필요한 문제는 제처 두고 무작정 열심히만 한 나보다 그녀는 훨씬 현명했고, 멀리 보고 있었다. 역시 '요즘 애들'은 영민했다. 

 삿포로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더니 반가운 카톡이 와 있었다. 대학 때 교내 방송국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 A였다.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반갑고 놀란 마음에 10년 만에 연락했다고 했다. 몇 마디 오고 가지도 않았는데 대화는 바로 본론으로 미끄러졌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싶다. 너나 나나 참 열심히 살았는데, 왜 사는 게 점점 더 힘든 거니."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소위 '잘 나가던' 그녀에게서 너무나 익숙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왜 우리는 왜 '요즘 애들'처럼 직업을 고르기 전에 좀 더 알아보지 않았을까. 우리가 선택한 일이 가정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지 조금만 고민했더라면 이제와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의 후회를 듣고 있자니 1년 전 나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 후회와 좌절은 나와 내 친구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에 대한 고려 없이 무작정 사회에, 그것도 남성이 주류인 영역에 용감하게 진입한 내 또래 여자들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홋카이도 후라노의 '팜도미타' 전경. 인생샷 성지로 관광객들에게 유명하지만, 좀처럼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도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았다

86년생인 나는 여성이 남성을 압도하기 시작한 첫 세대였다. 대학을 다닐 때쯤 각종 고시의 수석이 여성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고, 취업을 준비할 때쯤 '실력으로만 뽑으면 죄다 여성'이라는 미디어의 탄성(혹은 탄식) 이 나오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최소한의 가능성만 보여주면 부모님은 남자 형제와 별 차별 없이 나에게 투자했다. '여자라서 그 직업은 안 된다'라고 누구도 내 꿈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의 일'로 여겨지던 영역에 진출한다는 사실은 유능함의 증거가 됐다. "딸아,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가 내 부모 세대의 공통적인 양육 철학이었다. 그렇게 큰 많은 딸들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택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사회는 부모가 주입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지만 술로 승부를 봐야 하는 사내 정치는 여전히 실력을 압도했다. 불필요한 야근의 연속은 불합리와 체력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여자들에게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아무리 수석으로 입사해도 결혼하고 나면, 출산하고 나면 너무나 쉽게 메인 부서에서 밀려났다. 무엇보다 '육아 문제'는 정말 복병이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언젠가는 육아문제에 부딪힐 것'이라는 경고를 거의 듣지 않고 자라 온 우리 세대는 이 문제를 마주하고 심각한 당혹감을 느꼈다. (아마도 어른들은 우리가 사회에 진출할 때쯤이면 해결책이 생길 거라 막연히 기대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경고도 없었고 복선도 없었기에 더 당황했고, 더 두려웠다. 직업을 선택할 때까지만 해도 가정과의 양립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막상 일을 하고 보니 이 문제는 쉽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미디어는 '슈퍼맘' 프레임으로 여성이 일과 가정 모두를 가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주입했지만, 잠깐이라도 슈퍼맘으로 살아 본 여자들은 슈퍼맘은 허울일 뿐 실은 일과 가정에서 양쪽으로 시달리는 '상처맘'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게 좌절하고 탈진한 수많은 딸들이 나처럼 집으로 유턴했다. 

탈진한 알파걸 1세대, 체념한 알파걸 2세대

 그런 알파걸 1세대로부터 학습한 것일까. '요즘 애들'은 좀 다른 것 같다. 물론 카페에서 엿들었던 대화, 독자와의 짧은 상담을 성급하게 일반화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대학 초년생이 벌써부터 일과 가정이 충돌하면 무엇을 버릴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직업을 정할 때도 가정과의 양립 가능성을 상당히 무게감 있게 고려한다. 단 몇 년 먼저 태어난 '언니'들이 결국은 육아에 발목 잡혀 일평생을 바쳐 일궈낸 성취를 포기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선 '동생'들은 육아와 어느 정도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실제 9급 공무원이나 약사처럼 상대적으로 가정 친화적인 일자리에 진출하는 여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지난해 여성 9급 공무원의 비율은 5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여성 의사는 25%에 그치지만 여성 약사는 64%에 달한다.) 어차피 여성에게만 육아를 맡겨두는 후진 시스템은 바뀌지 않으니,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다. 각개전투이고 체념이다. 

 거의 모든 사회 현상을 우리보다 3~5년 앞서 겪는 일본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저서 ‘비혼입니다만, 어쨌다고요?(非婚ですが, それが何か!? 2015)’에는 국가공무원 시험 1종과 2종에 모두 붙고도 2종을 선택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는 사례가 등장한다. 1종은 고위공무원이 될 수 있지만 2종은 잘 돼야 과장까지다. 반면에 2종은 경쟁과 업무 부담이 덜하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중심적인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보조적인 업무를 택한다는 뜻이다. 육아와 병행해 더 오래 일하기 위해. 우에노 지즈코는 더 기가 막힌 일화를 들려준다. 

 

"제가 명문 여자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젠더론 수업을 할 때 충격을 받았어요. 수업이 끝날 때마다 감상 쪽지를  받는데, 그중에 이런 감상이 있었어요. '선생님 수업을 듣기 전에는 종합직을 목표로 했지만, 수업을 듣고 나니 일반직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로를 변경하겠다는 내용이었죠." page 120


메인을 마다하고 보조를 자청하는 여성들 

 한 학기 동안 여성이 조직에서 겪게 되는 여러 좌절을 학습한 여대생이 관리자가 될 가능성을 스스로 내던지고 서무 같은(비하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권한이 덜한 직무로 자진해서 이동한다는 얘기였다. 한 때 유리천장을 깨겠다며 겁 없이 그라운드를 누비던 여자들이 탈진해 터덜터덜 벤치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다시 그날 그 독자의 질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번엔 대견하기보단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나는 복잡한 계산 없이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택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가정을 해치지 않을지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 이것을 과연 진보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 사회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동생'들이 더 영민하고 현명해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주전을 마다하고 후보선수를 자청하는 여자들이 많아지면 다시금 이 사회의 모든 힘이 남성에게 집중되지는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웃 나라의 낯선 풍경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그 독자가 원했던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일요일 오전 내 강의를 듣겠다고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기자가 되고 싶단 뜻이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기 전 "기자를 하면서도 충분히 가정도 잘 꾸릴 수 있다"는 확답이 듣고팠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 대답을 할 자격이 없었다. 나는 "여자가 하기에 기자가 좋은 직업은 아니다. 나도 그래서 그만뒀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지만, 오래도록 나는 그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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