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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Aug 25. 2017

결국 나를 일으키는 건 '잘 되고픈 나'

전업주부로 살아보니

 한 문장 때문에 책을 사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며칠 전 휴가차 떠난 일본에서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들었다. 작가 김영하가 그날 낭독한 책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 '이모'였다. 고속버스 옆 자리에 탄 남편은 꾸벅꾸벅 졸고, 인터넷은 터지지 않고. 심심함에 몸을 꼬다 미리 다운받아 온 팟캐스트 가운데 무작위로 하나를 틀었는데 하필 이 단편이 김 작가의 낭랑한 목소리에 실려 흘러나왔다. 

 반쯤은 잠이 오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듣기 시작했는데(원래 이 팟캐스트는 수면용이다) 웬걸. 정신은 점점 더 또랑또랑해졌다. 급기야 이 문장을 듣고는 자려는 의지를 완전히 접었다. '희망 없이는 자유도 없다' 퇴사 후 나를 잠식해왔던 지독한 무기력의 정체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 땅을 밟기 무섭게 나는 서점으로 갔다. 그리고 활자화된 이 문장을 오래 응시했다. 

무기력을 평온이라 착각했다

 지난해 9월 회사를 나오고 미리 정해뒀던 발리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나는 집으로 숨어들었다. 사표를 낼 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계획이 없지 않았다. 한 때는 꽤 유창했으나 이제는 인사말조차 어색해진 스페인어를 다시 배우고, 여차하면 페루나 칠레 같은 곳으로 여행도 다녀오려 했다. 회사 다닐 땐 엄두도 못 냈던 조조영화도 보고 다시 열성적으로 책도 읽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 중에 실제 행동에 옮긴 건 독서뿐이었다. 그마저도 예상치를 한 참 밑돌았다.

 실패했던 계획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품고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숨까지 잘 못 쉬었던 내게 여행은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겁이 많아 여태 단 한 번도 혼자 여행을 가지 못했는데, 무너진 멘탈에 의지하고 가려니 더 엄두가 안 났다. 낯선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가 두려웠다. 여행은 일단 선택지 맨 끝으로 미뤄뒀다.

 스페인어를 배우려는 계획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집요한 훼방꾼은 내 안에 있었다. '그거 배워서 어따 쓰게?' 배우려는 모든 시도가 이 질문을 넘지 못해 자꾸 주저앉았다. 옴짝달싹 못하는 영화관보다 집에서 보는 게 아무래도 편하다는 '편함 우선주의'에 조조영화는 밀리기 일쑤였다. 

 이 모든 변명을 관통하는 건 '노 스트레스(No stress)'였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태풍 전야처럼 요동치던 마음이 잔잔해질 거라고 믿었다.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수반되는 일은 웬만해선 시도하지 않았다. 확실히 마음이 회사를 다닐 때처럼 자주 고점과 저점을 왔다 갔다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스트레스가 없으면, 평온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기분은 평균적으로 저점에 머물고 있었고, 어떤 일에도 신이 나지 않았다. 특히 심각한 건 무기력이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 침대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10분 전에 읽었던 연예뉴스를 읽고 또 읽었고 그마저 떨어지면 나를 향해 사납게 빛을 쏘아대는 액정을 멍하니 바라봤다. 청소랑 요리만 겨우 하고, 냉장고 청소니 서랍 정리니 회사 다닐 때 벼러뒀던 일에는 손도 못 댔다. 무엇이든 할 시간과 자유가 내 손에 있는데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선 이 무기력의 끝엔 평온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빨래를 꺼내다 우연히 창 밖을 봤는데,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1분은 길었지만 한 달은 빨랐다. 순간은 길었는데 돌아보면 순식간에 한 달이 갔다. 딱히 새롭게 한 일이 없으니 그날이 그날 같았고, 매일이 동질적이니 한 달이 하루처럼 뭉터기 졌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한 일은 매일 한 시간의 요가와 1주일에 한 두 권의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미약한 행동에도 나는 조금씩 변해갔나 보다. 언젠가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마주친 문장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쓸 데 없는 것이 여자를 살게 한다(신달자,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 中)' 같은 문장을 옮겨 적었다. 그런 문장들이 꽤 도톰한 수첩을 3분의 1 정도 채웠을 때 나는 다이어리를 샀다. 저녁거리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집에 오다가 집 앞 문방구에서 충동적으로 사버렸다. 그리고선 집 근처 카페에서 첫 일기를 썼다. 며칠 뒤 나는 책 '뽑히는 글쓰기'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무기력은 희망이 없는 상태

 당시엔 다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일의 의미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건 어떤 '전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이어리 첫 장을 열었기에 장마철 습기보다 더 내 몸에 찰싹 달라붙은 무기력을 떼어낼 수 있었다. 다이어리를 샀다는 건 더 이상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였고, 내 일상을 관리해 무언가 이뤄보겠다는 다짐이었다. 나아가려는 의지도 방향도 없는 사람이 시간을 관리하고, 메모를 남기는 일은 없다. 

 내가 한 동안 앓았던 무기력의 원인이 '희망 없음'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퇴사 후 자동적으로 전업주부가 된 내게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거나 하는 적극적인 목표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지내다 아기가 찾아오면 성심성의껏 키우겠다는 소극적 의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도 삼신할매도 이런 나약한 마음가짐을 가진 내게 아이를 주지 않았고, 나는 희망이라는 앙꼬가 빠져있는 텅 빈 자유 속에서 힘없이 방황했다. 정말이지 희망 없이는 자유마저 따분했다. 

결국 나를 일으키는 건 '잘 되고 싶은 나' 

 가까스로 무기력을 떨치고 개과천선하여 다시 열정적이고 성실하던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고 이 글을 끝맺고 싶지만 솔직히 그러지는 못했다. 무기력은 생각보다 관성이 셌다. 출간 계약을 맺고도 나는 자주 침대에서 밍기적거렸고, 재미도 없는 특선영화를 틀어주는 TV앞에서 몇 시간이고 머뭇거렸다. 한 번에 바뀌지 않는 스스로에게 실망도 자책도 많이 했다. 이뤄내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왜 여전히 무기력한 지 실체를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기력과 게으름이 다르다는 걸 알기에 조바심을 내진 않는다. 잘 살아 내고 싶은 의지가 있는 한 그건 무기력이 아니라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무기력만큼 질긴 놈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쉽게 떨쳐낼 수 있다.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나’는 결국 '잘 되고 싶은 나'에게 지게 되어 있다.

  책을 사고 ‘희망 없이는 자유도 없다’는 문장 곁을 오래 배회했다. 이 문장은 이 단편의 주인공 ‘이모’의 말이자 작가의 말이었다. 동생이 친 (돈) 사고 뒷수습을 하느라 번듯한 직장도, 사랑하는 사람도, 소소한 사치도 상실한 주인공 '이모'는 예순을 앞둔 어느 날 가족과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하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거의 반세기 만에 가족에 대한 부담과 책임에서 해방된 그녀지만 막상 그 해방을 통해 손에 쥔 건 충만한 자유가 아니라 지독한 자기혐오와 증오뿐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 뜨악한 진실을 마주한 그녀는 다시 예외 없는 규칙으로 구성된 일상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다. 의미 없는 자유 따위 사절이라는 듯이. 

 이제 나는 안다. 무언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 간절히 되고 싶은 상태가 진짜 자유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무기력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내 안에 남은 쌀알 만한 의미라도 정성껏 붙드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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