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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Apr 26. 2018

"누가 당신 더러 돈 벌어오래?"

내 편이 나를 주저앉힐 때 

어제는 날이 참 좋았어요. 봄다운 날이었죠. 온 세상에 무대 조명을 비춘 것처럼 강렬하지만 반가운 봄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집에 돌아오는 길, 아는 얼굴을 마주쳤어요. 제 단골 카페의 사장님이었어요. 

먼저 그 카페에 대해 말하자면, 3500원에 맛 좋은 카페 라테를 만들어주는 테이블 다섯 개짜리 작은 카페예요. 원래 총각이 혼자 꾸려왔는데 작년 10월인가 여자 사장님으로 바뀌었어요. 귀찮아서 쿠폰을 잘 찍지 않는 제게 작은 타르트를 서비스로 주던, 조용하지만 진정성 있는 서비스를 하던 그 총각 사장님이 떠나버려서 서운한 마음에 한 동안은 발길을 끊었는데, 그만한 가격에 그만한 커피를 내주는 데가 없어 다시 그곳을 찾았어요. 커피맛은 그대로인데 분위기가 확 바뀌었더라고요. 손님한테 말을 거는 법이 없는 총각 사장님과 달리, 새 사장님은 늘 하이톤으로,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어요. 압권은 인사였어요. "또 오세요~" '어서 오세요'는 어딜 가도 듣지만 '또 오세요'는  제겐 좀 신선한 인사였어요. 부탁인 듯 당부인 듯 건네는 그녀의 인사는 마치 주술 같아서 저는 또다시 단골이 되고 말았지요. 주술에 걸린 이는 저뿐이 아니어서, 카페는 이전보다 훨씬 복작거렸고요. 

그런데 그렇게 환한 인사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던 그녀가, 어제는 그렇게 눈부시게 쏟아지는 봄볕 속에서 혼자 그늘을 만들고 걷고 있더라고요. 멍하게 땅만 보면서, 표정 하나 없이. 바닥난 에너지를 쥐어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어요. 표정 있는 그녀와, 표정 없는 그녀는 딴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제게 달라보였고요.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하는데 바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어요. 지지난 주 저녁. 폐점시간이 한 시간 앞두고 카페엔 저와 사장님 둘만 있는데, 양복 입은 남자가 들어오더라고요. 고생하는 와이프 데리러 왔나 보다 했는데 웬걸. 마실 것도 시키지 않고 자리에 앉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인터넷에 돌아 다니는 화제의 짤  '전광렬 총' 

                                                                                                  

"누가 당신 더러 돈 벌어오래?"

얼른 이어폰을 꼈어요. 손님한테 부부싸움의 현장을 들키는 건 제가 사장님이라면 너무 싫을 것 같더라고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이어폰을 끼고 자판을 10분 정도 세게 내리치다가 짐을 챙겨 나왔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나가주고 싶더라고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저는 카페를 갔어요. 며칠 지나자 사장님이 먼저 말을 꺼내시더라고요. 전업주부로만 살다가 큰 애 대학 보내고 카페를 시작했다고요. 둘째가 고등학교 2학년인데 갑자기 자신이 집을 비우니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고요. 아마도 그 날의 변명인 것 같은 그 말을 듣는데 저는 사장님이 너무 안쓰럽더라고요. 가족을 응원하기 위해서 20년을 유예해 온 자신의 일을 이제 겨우 갖게 됐는데 남편과 아이로부터 응원은커녕 항의만 받으니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 말을 하는 사장님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저는 그 어떤 슬픔과 울분보다 그 조용한 무표정이 무서웠어요. 분노와 격정이 이미 휩쓸고 지나간 그녀의 표정에서는 지독한 외로움만 남아있었거든요.

그 사장님한테 무슨 문장을 건넬 수 있을까.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인생 2막의 커튼을 막 제쳤는데, 가장 친밀하다고 생각했던 가족이 훽 그 커튼을 다시 내려버리려고 할 때. 그 배신감과 소외감을 달래줄 문장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처음엔 사장님의 대변인이 되어 남편에게 쏘아줄 말을 찾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진짜 필요한 건 응원이겠다 싶더라고요. '잘 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는 간단명료한 응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도 자신의 일을 하려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려면) 누군가 뒤통수에 총을 겨누는 가운데 정해진 시간 내에 밥을 하고 택시를 타고도 늘 뛰어가고 있으면 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中-


누군가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있는 순간에도 침착하게 쌀을 씻고, 청소기를 돌리고, 멸치 볶음을 만들고, 출근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대단한 일이 아니겠어요. 심지어 그 총을 어떤 날은 카페 손님이, 어떤 날은 나와 한 이불 덮고 자는 남편이, 또 다른 날은 내가 온 마음을 다해 키운 자식이 번갈아 잡는데요. 내 뒤통수를 향했던 총부리를 훽 낚아 채 상대를 겨누지도, 그렇다고 두 손 들고 '항복'을 외치지도 않은 채 그저 종종걸음으로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건 단언컨대 웬만큼 수양한 사람도 못해요.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거죠.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고 있는 사장님께 꼭 제 응원이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아내를 두었는지 모르는 사장님 남편에게도요. "또 오세요"라는 말이 제게 주문이 된 것처럼, '잘 하고 있다, 대단하다'는 특별할 것 없는 제 응원이 표정을 잃어버린 사장님과 이 땅의 워킹우먼을 일으키는 주문이 됐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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