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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Oct 06. 2018

'나답게'를 외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나답게 행동했는데 찝찝할 때 

기분이 안 좋을 땐 네이트판엘 갔어요. 가서 닥치는 대로 사연을 읽었죠. 남편이 유흥업소를 다녀온 것 같다며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여자의 사연, 뭘 해줘도 짜증만 내는 아내 때문에 덩달아 살기 싫어진다는 남편의 푸념, 사장이 자꾸 트림해서 퇴사하고 싶을 만큼 비위가 상한다는 직장인의 고충. 개중엔 제목부터 '미담'의 향기를 풍기는 훈훈한 글도 있지만,  제가 클릭하는 건 불행의 암내가 솔솔 나는, 불쾌하지만 묘하게 중독성 있는 글들이었어요. 그런 사연을 수십 개씩 읽어 내려갔어요. 피신하듯 이불속에 파묻혀서요.

 그렇게 어둠 속에서 6~7시간씩 스마트폰을 멍하게 바라보던 때가 있었어요. 퇴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에요. 싱크대엔 더러운 접시가 가득 쌓여있고, 먼지를 뒤집어쓴 이불이 곧 무너질 태새로 위태롭게 좁은 이불장을 견디고 있었죠. 정리해야 할 건 집안 살림 만이 아니었어요. 이제 무엇을 하며 이 무한한 시간을 채울 것인지, 아이는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기다리는 질문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저는 죽어라 네이트판만 봤어요. 침대에 세로로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 도저히 허리가 아파서 안 되겠을 때 고개를 들면 창밖은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어요. '아 오늘도 갔구나. 가주었구나.' 안도감과 허무함이 씻겨 내려가길 바라며 늘 맥주를 마셨는데, 그때마다 삼켰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기어이 식도를 거슬러올라와 저를 톡 쏘고 가더라고요. 그건 '나태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어요. 

 그렇게 씁쓸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패턴으로 꽤 오래 지냈어요. 그러다 알콜의 힘을 빌려도 좀체 잠들 수 없던 날,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됐어요. 내일은 꼭 도서관에 가리라. 가서 네이트판 대신 읽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오리라. 어떻게 됐게요? 못 갔어요. 그날도, 그다음 날도. '누워서 핸드폰만 보는 나'가 너무 편한 옷이었거든요. 피부 같다고 말할 정도로요. 그러나 그 편한 옷을 입을수록 이상하게 제 맘은 더 불편해졌고, 점점 더 스스로가 싫어졌어요. 

 굳게 맘먹고 그 옷을 벗었어요. 도서관에서 가서 회원카드를 만들고 책을 빌려 온 거죠. 그날 책 다섯 권이 든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믿을 수 없게 가볍더라고요. '잘했어. 역시 너야.' 이런 오글거리는 말을 할 정도로 급격히 제 자신이 좋아졌어요. 그렇게 벅차오르던 감정이 한 차례 증발하고 나니 한 가지 깨달음이 남더라고요. '뭘하면 내가 좋아지는지 앞으로는 좀 관찰해야겠다.'

온스타일 광고화면 캡처. 

 제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패턴이 있더라고요. 상황이 불만족스러울수록, 스스로가 작게 느껴질수록 더 맹렬하게 남을 엿본다는 것. 네이트판에 널린 불행한 사연들을 정독하고, 덜 친한 친구의 SNS를 들락거리며 열등감을 자가발전시키고 있었어요. 관찰하니 보이더라고요.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는 제 자신이.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남겨진 짙은 '자기혐오'가.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내가 더 좋아졌는지를 하나하나 써 내려갔죠. 달달한 에그타르트 먹기부터 마음먹은 일 해내기까지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행동들'을 틈날 때마다 적어 내려갔어요. 당연히 그 반대, 그러니까 어떻게 행동했을 때 내가 싫어졌는지도 기록했어요. 바닥을 드러내며 남편과 싸우거나-아무리 내가 옳아도- 특정 집단을 혐오할 땐 저조차 제 곁을 떠나고 싶더라고요. 이런 방식으로 제 자신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 나갔어요. 

 그랬더니 의외의 결과들이 발견되더라고요. 저는 제게 '쌈닭 기질'이 있다고 생각해 왔고, 그래서 부당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나답게'를 외치며 갈등을 피하지 않아 왔는데, 알고 보니 제가 갈등을 무척이나 힘들어하더라고요. 누군가와 싸우고 돌아서면 후련한 게 아니라 찝찝했는데 그래서 그랬나봐요. 것도 모르고 '할 말을 해야 나답지!'라는 생각에 피할 수 있는 갈등도 굳이 정면으로 들이받았으니. 네이트판도 마찬가지. 사연에 정신 팔려 애초에 나를 열 받게 했던 사건을 잊는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건 혐오에 물을 주는 행동이더라고요.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거칠고 부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행동하니 후회와 혼란이 뒤따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였어요. 오해가 관계를 망치잖아요. 나를 오해하면 스스로와 멀어지더라고요. 

 '나답게'라는 말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잖아요. '나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같은 질문도 팟캐스트에서 종종 받았고요. 그런데 나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나답게 산다'는 건 '내가 내키는 대로 산다'는 게 아니라 '나를 긍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산다'는 거잖아요. 뭘 해야 스스로가 좋아지는지 알아야 그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으니, '나답게'를 외치기 전에 '자기 관찰'의 단계를 꼭 거쳐야 하겠더라고요. 

  부끄럽지만 요즘도 종종 네이트판을 들러요. 다만 달라진 게 있죠. 홀린 듯 독한 사연을 클릭하다가도 어느 순간 멈춰 제 자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점. '뭐 때문에 우울한데?''계속 이러고 있으면 네가 싫어질 텐데 책을 읽으면 어때?'라고 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가 좋아지는지 알고 그 방향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게 성숙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요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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