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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Nov 11. 2018

자기실현적 암시, 자기실패적 암시

사주와 점집을 기웃거리는 당신께.

 코트를 입을까 바바리를 입을까 현관에서 머뭇거리는 계절이 되면 그렇게 점집이 당겨요. 올해는 다 끝나가는데 별로 이룬 건 없고, 내년은 좀 나아질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럴 때 꼭 옆에서 바람 잡는 친구 있잖아요. "내가 좋은 데 하나 알아놨어." 그 얘기 들으면 뭐 게임 끝이에요. 정신 차리고 보면 ATM에서 현금을 뽑고 있죠.

 그렇게 친구 따라 갔던 점집이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딱 1년 전 이맘때였네요. "스무 살 때 사주 카페에서 만난 났는데, 요즘은 자기 사무실 차리고 스케줄 관리를 위한 '매니저'를 따로 둘 정도로 엄청 바쁘셔." 연예인도 아닌데 매니저라뇨. 친구의 절묘한 설명에 개처럼 뒤집힌 귀는 15만 원이라는 '상식 밖의 복채'에도 끝내 닫히지 않았어요. 저는 20 원하는 봉지 값도 아까워서 웬만하면 손으로 들고 가는 여자거든요. 그런 제가 인생 '미리 보기' 한 번 해보겠다고 15만 원을 선뜻 결제하다니 이례적인 일이었죠.

  '운수대통'까진 바라지도 않았는데, 결과는 정말 실망스러웠어요. 저를 데려간 친구가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요. 당시는 두 번째 책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를 탈고한 후였는데, 딱 잘라 말하더라고요. 잘 안될 거고, 중박도 힘들 거라고. 내년(그러니까 올해죠)은 돈도 잘 풀리지 않을 거고, 남편이 한 눈 팔 수도 있으며 한 마디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한 해가 될 테니 그냥 아기나 낳으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데 꼭 실연당한 기분이었어요. 희망에 배신당했으니 실연은 실연이네요.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춥던지. 바바리 입고 갔었거든요. 분명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괜찮았는데 올 때는 이가 덜덜 떨릴 만큼 춥더라고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희망은 핫팩 같은 거구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한 온기를 품고 있구나. 실체는 없지만 실재하는 그 온기 덕분에 그동안 나는 덜 떨었구나. 희망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후에야 희망에 온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대요.

 집에 돌아와 이불속에서 울었죠. 어쩌다 내가 복채로 15만 원을 낼 만큼 나약해졌을까 속상해서 울었고, 괜히 그런 걸 봐서 그나마 남아있던 희망마저 빼앗겼다고 후회하며 울었어요. 희망 없는 시간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아는 저로써는, 아무것도 안 풀린다는 2018년이 다가오는 게 겁부터 났죠. 그래서 증명해야 했어요. 그가 틀렸다고요. 점쟁이가 한 말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제 경험을 근거 삼아 그를 반박하고 부정해야 했지요.

 인터넷에서 '무스트라다무스'라고 돌고 있는 짤. '자기실현적암시'의 끝판왕이네요. / SBS 방송화면 캡처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점쟁이 부정하기'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요. 그 무엇도 거저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얻었거든요. 그 해(年)가 '길(吉)하다'는 건 아마 이런 뜻일 거예요. 내가 가만히 있어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파도가 나를 밀어주는 때. 반대로 소득 없는 해라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시기겠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정확히 반대쪽에서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 때문에요. 올해가 후자라면 어차피 제자리일 텐데 포기할까도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주긴 싫더라고요. 한번 내주면 영원히 내주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악물고 발버둥을 쳤어요. 원하는 곳에 가진 못하더라도 맥없이 가라앉지는 말자는 심정으로요. 눈 떠보니 다행히 밀려나지는 않았더라고요.

 한 해 한 해 살아갈수록 희망을 품고 사는 일이 참 쉽지 않다는 걸 느껴요. 그럴 때면 또(!ㅠ) 돈 몇만 원에(물론 15만 원일 때도 있습니다만..) 손쉽게 희망을 '구매'하고 싶어지죠. 한 때는 그런 제 나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요즘은 다른 생각을 해요. 돈 주고 산 허술한 희망에 의지해서라도 잘 살고자 하는 마음, 그 간절함이 비웃을만한 건 아니라고.

 세상 똑똑한 소크라테스도 무녀에게 신탁을 맡겼다고 하죠. 모르는 것 없어 보이는 작가 김영하도 용하다는 도사를 찾아가 몇 번이고 미래를 묻던 시절이 있었고요. 점집 순례 끝에 '말과 글로 먹고 산다'는 예언을 겨우 득한 그는 그 말에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갔어요. 그는 이렇게 말해요.

우리에겐 자기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안 풀릴 때는'자기실현적 암시' 마저도 맘대로 구해지지 않잖아요. 그럴 때 포기해 맥없이 가라앉지 말고, 발버둥이라도 치면 최소한 '자기실패적암시'가 현실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오늘도 무료운세와 점집을 기웃거리는 안쓰럽지만 대견한 당신께, 꼭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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