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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Sep 02. 2018

엄마에게 필요한 건 희생이 아닌 '희망'

부자 엄마가 아니라 미안할 때

'맘마미아 2'는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픈 영화였어요. 엄마의 처녀 시절 BGM이었을 ABBA의 노래가 2시간 동안 재생된다는 점 만으로도 엄마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이 영화를 먼저 봐버려서(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건 낭비라고 생각하는 구두쇠이기 때문에) 결국 언니와 엄마만 극장으로 밀어 넣고 밖에서 기다렸어요. 

   팝콘을 품에 안고 해맑게 웃으며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엄마에게 손을 흔드는데, 순간 25년 전 그 날이 떠올랐어요. 그땐 엄마가 제 자리에, 제가 엄마 자리에 있었죠. "재밌게 보고와, 엄마 아빠는 여기서 기다릴게." 식구는 5명.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 한 편 보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저희 부모님은 늘 삼 남매만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고 당신들은 밖에서 기다렸어요. 겁이 많던 저는 영화가 끝나 갈 때쯤이면 조금 긴장했어요. 아까 헤어졌던 그 자리에 엄마 아빠가 없으면 어쩌지? 하고요. 그러나 어두침침한 영화관에서 조명이 환하게 켜진 입구 쪽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딛기만 하면 어김없이 엄마 아빠는 그 자리에 있었어요. 공룡과 타잔이 나왔던 영화보다 저는 그 안도감이 더 좋았던 기억이 나요. 

  '그깟 영화표 두 장 얼마나 한다고'라고 생각하시는 분 있을지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궁상이라고 인상을 찌푸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궁상맞은 기억이 제겐 참 많아요. 어린 시절 좀 가난했거든요. 깊은 산속 옹달샘도 아니면서 매일 보일러실에 물이 차오르곤 했던 10평짜리 반지하에 다섯 식구가 살았어요. 출근 전 고무대야 가득 보일러실 물을 퍼서 화장실에 버리는 건 아빠의 루틴. '출렁~출렁 다다다다(물 찬 대야를 들고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예요)' 하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제 유년 시절 BGM이었지요. 

 그렇게 빡빡하게 살면서도 참 많이 놀러 다녔어요. 여름엔 꼭 해변에 갔어요. '자릿세' 만원 아끼려고 까만 장우산을 챙겨가서 그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 놀았죠. 점심은 엄마가 꼭두새벽부터 싼 도시락. 고추장 불고기와 오이지가 단골 메뉴였는데 실컷 놀고 그걸 먹으면 정말 맛있었어요. 전시도 꽤 보러 다녔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건 백남준 비디오 아트전. 테레비(왠지 그렇게 발음해야 할 것 같은 TV였어요)를 쌓아 놓은 작품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더 또렷한 건 전시장 복도에서 먹었던 엄마표 샌드위치예요. 호일에 싸 차갑게 식은 샌드위치가 어쩜 그리 꿀맛이던지. 

 엄마는 바리바리 싸고 아빠는 바지런을 떨고. 그런 부모님의 '궁상' 덕분에 저는 해외 한 번 못 가봤지만 추억만큼은 어디서도 지지 않는 아이로 컸어요. 그거 아세요? 가난이 추억을 더 선명하게 해주는 거. 식당에서 '편하게' 사 먹으면 쉽게 잊혔을 한 끼가 바리바리 싸가서 '불편하게' 먹으면 한층 강렬해지거든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어요. 가난했지만 제법 행복했거든요. '조금 번거롭지만 크게 불만족스럽지는 않은 것.' 가난은 제게 그 정도의 의미로 남아있어요. 

tvN '짠내투어' 캡처. 다 커서 들으면 더 눈물나는 말. '엄마는 밖에서 기다릴게.'

문득 셈해보니 지금 제 나이가 그렇게 악착같이 놀러 다니던 엄마·아빠의 나이더라고요. 그제야 보였어요. 엄마 아빠가 그렇게 '바리바리''바지런'을 떨며 제게 주려고 했던 게 무엇인지. 그건 '희망'이었어요. 

 집 떠나면 다 돈이 잖아요. 돈 아끼려면 그냥 집에 있으면 되죠.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두 시간 동안 벌서듯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죠. 막말로 그깟 영화 한 편 본다고, 전시 한 편 본다고 애들 성적이 오를 것도 아닌데요. 이렇게 뭐든 다 부질없다고 생각해버리는 비관적인 사람이라면 애초에 궁상을 떨지도 않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궁상은, 희망의 몸짓이었어요. '내가 애쓰면 언젠가는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이, 매번 도시락을 싸야 하는 수고로움과 부자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눌렀을 때야 '궁상'이 나오는 거더라고요. 말이 쉽지, 희망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저만해도 인생이 조금만 방심하면 꼬여버리는 싸구려 목걸이처럼 느껴져 내다 버리고 싶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지금 저보다 더 가난했고, 더 못 배웠으며, 부양해야 할 가족은 많았던 저희 부모님이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게 너무 대견해 그 시절로 돌아가 등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더라고요. 

대신 전 이렇게 말했어요.

 "부모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고의 교육이야. 열심히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이 얘기를 엄마 아빠에게 해줄 거예요. 그때 어려서 못해줬던 칭찬 이제라도 듬뿍 해주려고요. '금수저'란 단어가 유행인 시대, 금수저를 물려주지 못한 많은 부모들이 끝도 없는 죄책감을 느끼잖아요. 무리해서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고요. 그런 분들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네요. 부모가 '희망적인 세계관'을 물려주는 것, 그것보다 가치 있는 교육도, 유산도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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