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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Aug 15. 2018

모든 차별은 '선택'이란 이름으로 온다

차별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더 괴로울 때

마지막 퍼즐 조각은 TV 속에 있었어요. 여느 때처럼 채널을 돌리다 슈퍼모델 이현이가 나온 예능 프로를 보게 됐어요. 그녀는 유럽 진출 초반에 겪은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말했어요. 

"오디션을 보려고 이탈리아까지 날아가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디자이너가 '노 에이지안(No Asian)'이라며 그냥 돌려보내는 거예요."

본능적으로 '차별'이란 단어가 머리를 스쳤어요.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유색인종 차별이 아닌가 싶었죠. 그러나 동시에 제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어요. 자신의 창작물인 쇼에 세울 모델을 '선택할 권리'쯤은 디자이너가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을 과연 부당한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때였어요. 한동안 애타게 찾던 퍼즐 한 조각이 뿅 하고 나타난 순간이. 

 당시 전 기를 쓰고 퍼즐을 맞추고 있었어요. 면접만 보면 '결혼은 했냐''아이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라는 질문에 가로막혔어요. 철저히 선택받는 입장이었던 저는 그 자리에서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어요. 집에 돌아와 분에 못 이겨 우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사장 입장에선 결혼한 데다 아직 애가 없는 여성을 섣불리 뽑기 쉽지 않을 거야. 그 현실을 인정해야 해." 그 얘기를 듣는데 말문이 턱 막히더라고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차별이, 타인의 악의나 무지가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라니. 그 면접관이 형편없고 나쁜 사람이라면 한껏 욕하고 잊으면 그만이겠지만,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 합리적인 보통의 경영진일 뿐이라면 그를 증오할 명분조차 없는 거니까요. 결국 과녁을 찾지 못한 분노는 저 스스로를 향했어요. '내가 더 탁월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을 거야.' 하필 이럴 때 '탁월함으로 모든 차별을 압도할 수 있다'던 오프라 윈프리의 명언은 또 왜 떠오르고 난리인지. 막강한 그들의 선택권 앞에서 제 인권은 너무 초라했어요. 결국 전 '내가 당한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라는 퍼즐을 완성하지 못했죠. 

tvN 인생술집 캡처 화면  

 그런데 그날 우연히 봤던 그 예능 프로가 고구마 같던 머릿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더라고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잠깐만. 대부분의 차별은 선택받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거 아닌가? 선택권을 다 존중해주면  군더더기 없이  명쾌한 차별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겠네. 

요는 그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했다고 해서, 내가 차별당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거죠. 이 연장선상에서 보니 노키즈존에 대한 생각도 자연히 정리되더라고요. 아이의 입장을 원천적으로 제한한다는 점에서는 차별 같은데, 업주 입장에서 보면 자기 가게 손님 자기가 가려 받겠다는데 그 정도는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차별이라고 두둔하기엔 카페나 비행기, 호텔 수영장에서 제가 겪은 일들도 적지 않았고요. 머리로는 차별 같은데 이상하게 업주를 편을 들고 싶은 게 제 솔직한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고 해서 차별이 아닌 건 아니다'라는 걸 이해한 이후로는 머리와 마음이 어느 정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이런 얘기를 이렇게 길게 쓰는 이유는 차별을 당하면서도 차별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제대로 분노조차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서에요. 제가 그 면접관에게 '결혼·출산에 대한 질문은 차별'이라고 당차게 말하지 못하고 얼굴만 벌게져 있었던 것처럼요.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단골 카페에 땀을 뻘뻘 흘리고 갔는데 며칠 안 간 사이 노키즈존이 되어 있어서 결국 돌아왔다. 사장님 입장도 이해하지만…씁쓸하다.' 

며칠 전 인스타에서 이런 글을 봤어요. 차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피해자가 가해자의 입장까지 헤아려 주면서 면죄부를 주고 있더라고요. 차별에는 그냥 분노해도 돼요. 역지사지는 미덕이지만,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역지사지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 반대라면 더없이 이상적이겠지만요. 

 참고로, 서울시 인권보호관은 지난 2016년 면접에서 결혼 여부나 연애 경험에 대해 묻는 것은 '차별'이라고 판단했고요, 이듬해 국가 인권위원회에서는 노키즈존을 차별이라고 결정했어요. 그리고 저는 차별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탁월함을 키우는 게' 아니라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믿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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