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를 키운다는 건, 공평을 포기하는 연습이었다

엄마는 너희를 똑같이 사랑하지 않아.대신,너희에게 필요한 만큼 사랑해

by 완성되지않은어른

어느 날 둘째가 말했다. “엄마는 맨날 누나 편이야.”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나는 꽤 공정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규칙을 좋아했고, 기준이 분명해야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에게 더 주거나 덜 주는 일은 불편했고, ‘똑같이’ 나누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매를 키우며 그 믿음은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졌다.


두 아이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같은 집에서 자랐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음의 톤도,

잠드는 방식도,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도 달랐다.


첫째는 태생적으로 느긋했고,

혼나고 울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편이었고,

(이 부분은 사춘기에 접어든 녀석이 돌변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며 앞으로 다룰 예정이다.)


둘째는 태생이 애교쟁이에 조심스럽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이 부분도 남자아이라는 예외적 특성이 작용하기도 한다.)


나는 처음엔 ‘공평’이라는 단어를 육아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똑같이 안아주고, 똑같이 혼내고, 똑같이 칭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현실은 늘 계획과 달랐다.


첫째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고,

그래서 엄마가 말하는 게 안 들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둘째는 같은 말에도 마음이 쉽게 상해서 토라지곤 한다.

늘 관심이 고픈 아이이다.


첫째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했고,

둘째에게는 설명이 필요했다.


같은 행동에 같은 반응을 하는 것이 과연 공평한 걸까 하는 의문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둘째가 말했다. “엄마는 맨날 누나 편이야.”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래 가슴에 남았다.

나는 분명 두 아이를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 속 저울은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후에 혼자 앉아 그 말을 곱씹었다.

혹시 나는 공평함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다름을 무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육아에서의 공평은 숫자가 아니었다.

시간도, 횟수도, 기준도 아니었다.


어떤 아이는 한 번의 포옹이 필요했고,

어떤 아이는 그 포옹을 기다려줄 시간이 필요했다.


같은 양의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그릇에 맞게 채워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이해했다.


남매를 키우며 나는 자주 흔들린다.


한 아이에게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날이면,

다른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채워질 때,

아이들은 비교하지 않았다.


비교는 늘 어른의 몫이었다.


공평을 내려놓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 한켠에는 ‘혹시 상처가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깊이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겉으로 보기엔 불균형해 보여도,

마음의 무게는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남매를 키운다는 건 결국 부모인 내가 가진 기준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공평해야 한다는 강박,

비교하지 않으려는 노력,

완벽한 부모가 되고 싶다는 욕심까지.


아이들은 나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동시에,

나 역시 아이들을 통해 사람을 다시 배우고 있다.


요즘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너희를 똑같이 사랑하지 않아.

대신, 너희에게 필요한 만큼 사랑해.”


그 말이 언젠가 아이들의 마음에 다정하게 닿기를 바란다.


공평을 포기하는 연습 끝에,

조금은 더 솔직한 부모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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