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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사 May 15. 2021

영화 <사도>, 보기 전 알면 좋을 지식들 (5)

영조 편 - 탕평...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노론의 아이돌 영조가 데뷔했다. 노론의 문자투표는 아니고 그냥 노력해서... 

사실 왕이라는 게 노력으로 즉위가 되면 안 되는 건데, 네 그렇습니다. 

어쨌든 영조, 너무 길어지고 있다!!사도는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이것까지 알고 사도를 봐야 한다!

하지만 나온다... 노론이 영조 긁는 장면도, 노론이 영조 왕 만들어 줬다고 하는 장면도... 반대측이 영조 독살어쌔씬이라고 일갈하는 장면도... 다 나옵니다 다 나와...

이 이야기는 영조가 즉위한 후에 탕평을 진행하는 과정&하지만 은근히 노론에게 못 이기는 과정이다. 작중에서 영조가 대신들과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대입 수능한국사,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를 할 때 귀에 박히게 듣는 조선후기 임금 두 명 정조&영조. 이 둘의 공통점은 탕평이다. 앞서 쓴 내용에서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얼마나 붕당 정치에 치여 살았는지를 봤다면 그가 탕평을 주장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목숨 자체가 간당거리던 시기였으니 말 다 했다. 

솔직히 탕평책은 다들 시험공부 하면서 다들 봤다고 했으니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간단하게 어원만 설명해 보자, 탕평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상서(尙書) 중 나오는 「황극설 皇極說」의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이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편중된 곳 없고 당파 없는 치우침 없는 정치가 좋다는 의미로 대충(!) 알아들으면 되겠다. 

사실 이 말은 숙종 대 처음 나온 용어인데... 이 얘기 하면 일만 자 될 것이라 줄여두고, 영조의 이러한 탕평책에 대한 의지는 즉위 초 삼정승의 관직 제수에서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유봉휘를 좌의정으로, 조태억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영조 즉위년 10월 3일의 기사이다. 

이광좌는 앞선 글에서 잠깐 나왔는데... 정말 잠깐 나왔다. 소론 온건파의 거두이다.  

유봉휘는 연잉군의 세제책봉에 대해 격하게 반대한(!) 소론 강경파이다. 

조태억은 이광좌와 함께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에 반대한 소론 온건파의 대신이다. 

어쨌든 거의 소론으로 정국의 요직을 구성한 것이다. 노론은 조금 억울할 만두...목숨 바쳐서 역적질하고 살려놨더니 말이야...(사도 영화 중간에도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아버지 세대가 왕위에 올린 주상=영조라는 언급... 자세한 것은 영화에서 확인하세요.) 


물론 소론만 냅다 올려쳐주면 그것이야말로 탕평이 아니다. 영조는 삼정승을 소론으로 구성했으나,동시에 소론의 과격파, 목호룡의 고변에서 나왔던 그 이름 김일경을 절도(=외딴 섬)에 안치했다.  

노론을 살려내기 위한 베이스 작업 중 하나였다. 

김일경(金一鏡)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였다.

영조 즉위년 11월 11일의 일이다. 


이렇게 소론을 한 번 올려주면 또 한 번은 내려주고 하듯이, 영조는 탕평책을 펼치면서 밸런스 조정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러한 탕평책의 수단을 양치양해라 한다. 연대책임이랑 비슷한 의미인데, 소론을 벌주면 노론이 의기양양해지고 노론을 벌주면 소론이 의기양양해지니, 소론을 벌주면 노론도 그참에 같이 벌주는 것이다. (다른 이유든 같은 이유든.) 이외에도 쌍거호대 등...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여튼 여러 방법을 통해 탕평책을 시행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영조가 탕평책을 하기엔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해야 할까... 노소론으로 나뉜 붕당 정치는 이미 앞선 왕조에서 피를 한 번 봤기 때문에 내가 맞은 만큼 너네도 맞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좀 생긴 이후였다. 특히 숙종이 한바탕 하고 난 환국정치 이후로는 더더욱!

결국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든 탕평으로 살리고 싶었던&하지만 노론 측에 목숨을 빚진 경험이 있는 영조는 꽤 딜레마가 생긴 상황이었는데, 어떻게든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이 개싸움 직전의 상황을 이끌어 간다. 

즉위 초

대충 봐도 당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외친 탕평책은 우리함께 탕평탕평 합쉬다 좋은세상 합쉬다~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때려맞힐 수 있다... 이 난장판을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 방법 시도 이런 느낌이지

탕평합쉬다~



을사처분(소론제거, 노론등용)
→정미환국(소론집권, 을사처분 취소!)
→무신란(이인좌의 난, 노론 집권)
→기유처분(노소 탕평등용)
→경신처분(신임옥사 무옥 처분, 노론 집권)
→신유대훈(임인옥안 불사름)


영조 1년부터 17년까지 있었던 일을 요약한 것이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이후 몇 가지 사건을 통해 노론이 독점적으로 집권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시작은 탕평이었는데!)


우선 을사처분은 신임옥사를 무옥으로 규정하고, 노론 4대신(앞선 역모사건에서 죽은!)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이다. 과천에 이들을 위한 서원도 건립했다 무려 사충(四忠)서원... 나름대로 노론도 집권가능하게 숨통 틔워 주고 영조도 역적이름 조금 지우고 일단 윈윈했다. 


정미환국은 그 반대이다. 앞선 을사처분으로 인한 소론의 반발을 우려해 을사처분 내용 자체를 아예 물러 버렸다. 4대신은 도로 역적이 되었고... 죽어서도 편치가 않다. 

이렇게 임인옥사는 다시 역적무리의 흉악한 역모 사건으로 돌아갔고, 이제 소론이 숨통이 트였다. 


이 뒤집었다엎었다가 반복되다가 무신란이 일어난다. 무신년(영조 4년)에 일어난 사건이고, 이인좌의 난으로도 불린다.  영조 즉위 이후로 기세등등한 노론을 보다못한 소론&정치에서 밀린 남인층이 일으킨 전국적인 정변으로, 연잉군-경종 독살 의혹을 MSG삼아 일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종친 한 명(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삼겠다고 했었다... 영조 이때 현타 찐하게 왔을 듯. 하여튼 진압이 되어 마무리된 사건이긴 하다. 특이한 건 이 무신란을 진압한 세력이 모두 소론 측이었다는 것. 

소론의 반란을 막는 소론


기유처분은 무신란 이후 현타 찐하게 온 영조가 뒤집었다엎었다를 또 한다. 근데 이번에는 조금 솔로몬으로...

노론도 얼마나 설쳤으면 이런 일의 원인제공을 했는지 얄밉고 소론도 주도자라서 얄밉다. 이때 본격적으로 '탕평파'를 등용하기 시작한다. 이 절충과정에서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구분하게 되는데, 신축은 충(忠)에서 비롯된 것이고, 임인은 역적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론 4대신도 절반만 명예를 회복시켜 줬다. 이건명 조태채는 충신, 이이명 김창집은 역적. 이런 솔로몬이 없다. 어떻게든 노론소론을 잘 수습하고 싶었던 마음이 느껴지지 않은가...안타까움... 


경신처분에서는 약간 포기의 마음이 느껴진다(드립입니다~영조 화이팅!). 노론 측에 신축&임인년에 영조가 목숨을 빚진 으으리...신임의리를 대놓고 다루면서 스스로를 완전히 신원시킨다. 역적 수괴에서 명예회복 뿅.

앞서 한 기유처분 또 무르고, 탕평파를 팽하고 노론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김창집 이이명을 다시 충신으로 만들었으며 당연히 신축&임인도 둘 다 무죄로 만들었다. 이제 아무도 영조를 막을 수 없으셈. 


그리고 이후 신유대훈에서 말하는 임인옥안이란, 경종 대 임인옥사(=경종 시해 모의 사건)를 조사한 문서인데, 여기서 역적수괴(!)로 연잉군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불사르고 완전히 없는 일로 삼는다는 것은 즉 노론 측의 결백을 증명하고 4대신의 신원을 복귀시켜줬다는 의미이다. 우리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론 탕평에서 노론 탕평으로 가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축&임인년의 사건(세제 책봉+대리청정+임인옥사+etc...)을 겪고 죽다 살아나면서 붕당의 폐해를 실감하고탕평을 외친 영조임에도 결국에는 붕당의 완벽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외척의 가능성만 생겨났고, 죽다 살아나는 과정에서 영조가 노론에게 빚진 짐을 완전히 벗지도 못하고... 힝. 참고로 우리 교수님은 영조의 탕평책을 어떻게 평가할 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음.  

뒤로 볼수록 영조가 약간 에라모르겠다 한 듯한 느낌이 되는데 기분 탓이고 드립입니다. 영조도 노력하긴 했으니 뭐...어쩌겠어 화이팅 연잉군 이금! 그리고 물을 죄가 있다면 붕당 정치에 피 잔뜩 묻히고 서로에게 복수심만 남긴 선대왕들에게 뭐라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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