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 후 한 마디: 나가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라. 설경구 배우는 혹시 젊은 남자 배우와의 chemistry를 선호하는 것이여? 어째 나오는 영화마다 보송보송한 배우들이랑 찍구마잉.
사학도(사학자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일말의 양심이 있기 때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영화감독 이준익의 신작이 돌아왔다. 그 이름도 찬란한 자산어보玆山魚譜로, 정약용의 형아, 정약전이 귀양 가 있던 흑산도 연해의 물고기들을 적은 책이다. ‘어보’의 ‘어’도 물고기 어魚, ‘보’는 족보 보譜자로 직역하자면 ‘자산의 물고기를 적은 책’쯤 되겠다. 앗, 잠깐만, 흑산도에서 유배를 지냈는데 왜 자산이 아니라 흑산인가요? 어린이 여러분의 질문을 미리 헤아린 듯 정약전 선생님은 저서의 서두에서 이를 요로코롬 설명한다.
자산의 滋는 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으므로 자산은 곧 흑산과 같은 말이나,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두려운 데다가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흑산 대신 자산을 사용하였기에 자산이라는 말을 제명에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ㅎㅎ 어딜가도 원문을 찾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흑산도는 어감이 별로나 의미가 같은 자산을 사용하였다는 뜻. 한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깊이 부여하는 게 딱 조선시대 학자답다. 여기서 한국지리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흑산도가 어딘지 개념이 모호할 게 뻔해, 친히 설명과 사진을 첨부하였다.
흑산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섬이며, 섬 자체가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참고로 함께 황사영의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2차 유배에 오른 동생 정약용의 유배지는 전라남도 강진이었는데, 그곳에서 정약용은 정치인들 필독서라는 목민심서를 집필하고 백련사의 스님들과 교류하였다. 정약용의 이야기는 훗날 다시 다뤄보도록 하고, 지금은 정약전과 흑산도에 집중해보자.
<한창 세상 만물에 관심이 많을 나이, 48~58살>
어째서 정약전은 정6품의 병조(조선의 군사 담당 기관)의 좌랑을 역임하다 흑산도로 끌려온 걸까? 바로 앞에서 언급하였듯 1801년 (순조01) 신유사옥과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신유… 뭐요? 덜덜 떨 독자들을 위해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문헌 하나를 긁어왔다. 배경 설명과 곁들여 읽어보자.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두 명의 왕 중 한 명인 (이 띄어쓰기가 올바른 맞춤법이란 사실이 믿겨지십니까?) 1800년 6월 24일 정조가 승하한 이후,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부친은 경주 김씨, 노론 벽파-서열짱)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1801년(신유년) 1월 10일-정조의 승하 뒤 1년도 되지 않았을 시점-대왕대비는 사학 엄금을 명령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2권 1년 1월 정해 1번째 기사)
여기서 말하는 사학은 사악하다, 할때 그 간사할 사邪자로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사학四學과 필자의 본전공인 사학史學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史學과를 나오면 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두면 삶에 유용하겠다. 아무튼, 사악한 학문을 한 대가로 정씨 형제들은 천주교도 수색에 끌려가게 된다.
첫째 정약현(1752년), 사위가 그 ‘황사영’이었으나 본인은 천주교를 믿지 않음
둘째 정약전(1758년), 신유박해 때 잡혀감, 자산어보를 쓴 우리의 주인공, 경구 아저씨
셋째 정약종(1760년), 신유박해, 신유사옥 때 순교
넷째 정약용(1762년), 신유박해 때 잡혀감,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
첫째 정약현은 의령 남씨 부인 소생이고 정약전~정약용 형제들은 해남 윤씨 부인의 소생이다.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인물은 둘째 정약전과 넷째 정약용. 정약전은 1801년부터 유배길에 올라 유배가 풀리지 못한 상태로 1816년 사망하게 된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게, 정약전이 처음부터 흑산도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신유박해 때는 정약용은 경상북도 포항, 정약전은 전라남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황사영의 백서 사건 때 다시 연루되어 강진/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TMI: 황서영의 백서 사건이란? 신유박해로 천주교도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황서영이 충정도 제천의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토굴 안에서 숨어 쓴 밀서. 내용은 청에서 조선을 압박하여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해달라, 또는 청나라의 한 성으로 포함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와 군대를 데려와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해 달라는 등의 요청으로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 하였음.
영화 내에서도 언급이 나오는 부분으로 정약전은 곧바로 흑산도로 가지 않고 우이도-흑산도-우이도에서 총 16년의 유배 생활을 보낸다. 당시는 우이도가 흑산도 권역으로 포함되어 그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모양, 현재로선 1801년~1807년을 우이도 시기로 추정하고 있고 1806년 또는 1807년부터 1815년까지 흑산도에서 보내다, 1815년부터 사망에 이른 1816년까지를 다시 우이도에서 보낸다. 그가 말년을 우이도로 옮겨간 이유는 동생 정약용이 유배가 풀릴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약전은 아우를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여기까지만 봐도 무척 짠한 삶이지만, 이준익 감독은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저술하게 된 계기에서 언급한 ‘창대 (昌大)’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약전-창대라는 두 남자의 케미스트리를 창조해 그렇잖아도 안타까운 약전을 더 불쌍하게 만든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일명 昌大)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고서를 탐독하나 집안이 가난하여 서적이 많지 않은 탓으로 식견이 넓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조어(鳥魚)를 이목에 접하는 대로 모두 세찰(細察)하고 침사(沈思)하여 그 성리(性理)를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고 서차(序次)를 강구하여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지어 『자산어보』라고 하였다. 곁들여 해금(海禽)과 해채(海菜)도 다루어 후인의 고험(考驗)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게 없었으면 난 어쨌을까 몰라)
준감독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 유배 생활에 마음이 고단할 법도 한데 정약전은 섬 사람 장덕순, 창대를 만나 물고기의 정보를 물었던 모양이다. 이후 장덕순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영화와 달리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여생을 마무리 한 모양이지만, 유배지의 두 사람 간 우정이 빛났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