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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사 May 08. 2021

영화 <자산어보>,
보기 전 알면 좋을 지식들 (2)

개봉이 끝날 때까지 계속


영화배우 강하늘은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문명특급에서 "흑백의 제일 큰 장점은 눈썹, 눈, 코, 입, 이 표정이나 얼굴에 온전하게 집중이 되게 만든다. 영화에 집중이 잘 되고, 동주의 표정 하나하나에 이입을 하도록 만든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명맥을 이어가려는 것일까, 이준익 감독의 두번째 흑백 영화인 <자산어보> 또한 인물의 고통, 비애, 갈등과 같은 감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꾸꾸?


아마 독자 여러분도 '조선 후기'라는 단어를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 그렇겠지만,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정국은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웠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의 씨앗이 보이던 시기였다. 특히 붕당의 문제가 아~주 심각했는데 시작은 동인(이황쪽학문 성향)과 서인(이이쪽 성향)의 학문적 성격 대립이었다가 동인이 곧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고, 북인이 광해군과 함께 몰락하며 남인과 서인의 멋진 대결 구도가 펼쳐진다. 


시기 상으로 보면 이렇게 되겠다.


광해군(북인 몰락)

인조

효종

현종(예송논쟁)

숙종(서인vs남인, 환국)

영조(노론vs소론)

정조(노론 벽파vs노론 시파)

 

숙종은 붕당간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환국을 실시했지만, 경신환국(남인 to 서인, 남인 출신의 영의정 허적이 왕실의 유악을 쌔볐단 혐의로 서인에게 군권을 위임함. 유악(油幄)은 조선시대의 방수포를 의미)에서 기사 환국(장희빈이 희빈이 되며 서인에게서 남인으로 정권이 바뀜) 이후 갑술환국(장 씨가 폐비되고 인현 왕후가 복위하며 남인에서 서인(소론)으로 권력 이동)을 거치며 영조 때가 되자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엥? 갑자기 서인에서 소론이 왜 나오냐구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그렇습니다. 축출당한 남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와 같은 의제에서 노론은 보수적이고 강건한 입정을, 소론은 진보적이고 온건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죠. 


환국의 묵직한 한 방! 


자, 다시 영조로 돌아가보자. 어지러운 정신을 부여잡고 따라와준다면 좋겠다. 영화 <사도>에서도 계속 볼 수 있듯 영조는 노론과 손잡고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루머에 시달려 사람이 무척 예민했다. 거기에 이인좌의 난이 터졌으니, 오죽 하겠는가. 참고로 이인좌의 난은 이인좌가 주축으로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 소론 일부를 모아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 영조를 폐하자!'라고 청주성 등을 함락한 사건을 말한다. 영조는 나름 붕당 정치를 개선해보고자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면 세상 일 어디 쉽겠어요? 노력에도 불과하고 사도 세자의 죽음 이후, 정권은 노론이 꽉 잡게 된다.


영조의 어진


이제 정조다. 여기까지 달려와 준 사람이 있다면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읽지 않고 그냥 넘겼다고?…흠, 상처 주네. 기왕 정권을 잡았으면 싸움 없이 살아가면 좋으련만,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분열되고 만다. 이런 상황을 보며 영민한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는 다른 탕평책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지지해 줄 기구로 본래는 왕실 도서관이었지만 홍문관, 예조, 성균관의 업무를 통합해 붕당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규장각을 세운다. 그리고 그 규장각에 있던 사람이… 두구두구…… 바로 정약용이었던 것! 정약용은 규장각의 초계문신(어리고 재능있는 관료들을 규장각에서 교육 시켰던 제도)으로 생활하며 북학파들과 교류하였다.


류승룡 아님. 정약용임


아, 그래 좋다. 좋다 이거야. 정약용이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있었던 건 알겠는데 그래서 정약전은 언제 나와? 맞다! 이 이야기는 정약용이 아니라 그 형 정약전의 이야기다. 따라서 이야기의 흐름을 정약전으로 바꿔 보도록 한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1784년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천주교를 학문으로 공부할 마음을 품게 된다. 여기서 이벽이 말해준 이야기는 천지창조설과 천주교적 삶과 죽음의 관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약전은 『천주실의』와 같은 가톨릭의 도서를 탐독하였으며 천주교를 '믿는다'고 할 정도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 선택은 정씨 형제들에게 불운을 불렀으니, 윤지충의 외사촌 권상연이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조치를 취하자 이를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한 것. 우리로 치면 밥솥에 재를 뿌린 느낌일까? 아무튼 이를 계기로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는 논란으로 들썩이게 된다. 그리고 그 폭풍에, 정약전도 휘말려 들어갔다.




-3편에서 계속-







자료 출처: 

박천욱, 『교과서보다 쉬운 독학국사』, 일빛, 2004

정두희, 「인물평전 천주교 신앙과 유배의 삶, 다산의 형 정약전」『역사비평』제 13호, 역사비평사,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약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0%95%EC%95%BD%EC%A0%84&ridx=0&tot=5

우리역사넷 "정약용"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10700&code=kc_age_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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