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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Mar 03. 2018

아픈 몸을 산다는 것

<아픈 몸을 살다>를 읽고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은 삶의 수단이며 매개체다. 나는 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해서 산다. 정신을 몸에서 떼어내라고, 그러고는 몸이 어디 바깥에 놓여 있는 사물인 양 이야기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몸이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냉정하고 전문가답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학의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언제나 냉철하게 행동하라고 요구받는다. 몸이 고장 났지만 공포와 절망은 고장 난 일부가 아닌 것처럼 대해야 하고, 삶 전체가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한다. (25쪽)


아픈 사람의 책임은 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전혀 관계가 없다. 나는 자기 질병을 잘 표현하는 이들이 회복 가능성도 더 크다고 믿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마도 언젠가 사람들은 정신이 어떻게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질병을 잘 표현하는 이들이 질병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자기 삶을 충만하게 산다는 것뿐이다. 내겐 이것이면 충분하다. 충분해야 한다.

아픈 사람들은 이미 아픔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이 질병이 무엇인지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에는 이중의 책임이 따른다. 살아 있는 이들은 인간이 공유하는 취약함에 책임이 있는 한편 인간이 창조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취약하기에 창조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아픈 사람들은 표현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듣는 쌍방의 책임을 이해할 수 있다. 질병이 없는 인생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역설적이지만, 질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이들에게도 질병은 똑같이 고통스러워야 한다.
(201-202쪽)



심장마비와 암투병을 겪은 저자의 이야기다. 질병으로 인해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감동 수기가 아니라, 질병의 고통이 실제로 개인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어떻게 작용해서 몸과 마음을 변하게 하는지를 담아낸 책이다.

'환자',특히 암같은 중병환자-가 되는 순간, 나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의사에게는 '진료대상'으로, 가족과 친지들, 친구들에겐 '안쓰럽지만 어떻게든 명랑하게 이겨내길 기대받는 존재'로, 외부인에겐 '딱하지만 사회적 생산성이 사라진 존재'로 자리잡게 된다. 어디에도 아픈 사람의 진짜 속내를 들어줄 사람은 없고, 심지어 환자 본인조차도 자기의 진짜 감정-공포, 두려움, 좌절, 분노 등 <어서 극복해야만 할 것 같은 나쁜 감정들>을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 명랑하고 긍정적으로 투병생활을 해내는 환자는 격려받고, 우울해하는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처럼 비춰진다. 심지어 '암에 잘 걸리는 성격'같은 식의 이론 아닌 이론도 있어, 병에 걸린 사람이 '잘못 살아서 이렇게 되었구나'하는 죄책감마저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해 환자는 물론 그 환자를 돌보는 이마저 솔직한 자기 대면이나 표현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하게 된다. 이는 또 다른 고통-삶에서 유리된 것 같은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아픈 사람 본인 뿐 아니라 그런 이를 돌보는 사람까지도 일상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잃고 '괜찮은 상태에서 아프게 떨어져나와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참담한 기분에 빠진다.

나는 이렇게 아파본 적은 없다. 가족과 주변에 그렇게 아파봤거나, 중병을 선고 받고 두려워하는 이들은 있다. 그래서 저자의 심정을 내 것인양 공감할 수는 없지만, 하나만은 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내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비슷하게 느껴봐줄 수도 없고, 그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오롯이 내 몫이지만 철저히 내 통제 밖에 있는 일들이 바로 내 몸에서 제멋대로 일어난다. 생생하게 내 몸에서 벌어지는 재난과도 같은 사건들은, 우리 삶 그 자체와도 같다.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불행이 닥치면 닥치는대로 받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그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고, 몸을 우주로 해서 펼쳐지는 각종 이벤트들이 질병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서 그저 세상에 내던져져서 철저히 홀로 서야한다는 것'에서 실존적 고뇌를 느낀다고 한다. 긴 투병을 한다는 것은 추상적으로만 들리는 이 실존적 고뇌를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과도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질병 앞에서는 그저 내던져진 존재나 다를바 없다. 어느날 '암환자'라는 낙인이 찍혀 그 전의 정체성은 싸그리 사라지기라도 한 듯 암환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철저히 혼자 감내해야하는 육신의 고통은, 몸이라는 감옥에 갇힌 가련한 영혼처럼 처절하다.

아픈 사람들은 그저 몸의 어딘가가 망가져서 아프고 불편한 것만을 겪는게 아니다. 질병을 앓는다는 것은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며, 많은 것을 잃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경험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 보다는 극복하거나 미화되길 은연 중에 요구 받는다. 지켜보는 이들의 두려움이 현실을 외면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료인은 철저히 병만을 보고, 지인들은 아픈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곤란해한다. 저자는 아픈이들의 내적 처절함과 외로움을 담담히 이야기하며, 사회적인 시스템에 아픈 이들을 보다 세심히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녹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아픔과 두려움, 외로움 속에 놀라운 발견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삶에서 역경을 겪은 후 한단계 성장하고 삶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거나 성숙해지듯이, 질병도 그런 경험을 가져온다. 질병이라는 경험이 가진 특수성은, 그것이 죽음과 맞닿아 있어 지극히 위험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뷰의 낭떠러지'로 비유한다. 낭떠러지 아래의 까마득한 심연을 보면서 동시에 지금껏 미처 보지 못했던 온갖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포인트. 저자는 햇빛이 비치는 강물, 워크맨으로 듣던 음악의 가슴 벅찬 감동은 아프기 전엔 알 수 없었던 것들이라고 한다. 위험한 그 낭떠러지에 섰기에 비로소 보게 된 풍경이다. 하지만 늘 낭떠러지 아래의 심연을 보고 있어, 두려움을 곁에 두고 걸을 수 밖에 없다. 두려움이 있기에 볼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잃고 싶지 않아, 저자는 '언제든 다시 아플 수 있는 암환자'의 상태를 긍정하고 끌어 안는다. 억지로 부인하고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신화처럼 미화하지도 않는다.

질병 뿐 아니라 삶의 모든 행불행을 이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우린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두려운 심연은 우리 존재 자체에 내재된 속성이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죽음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삶에서 행복과 기쁨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불행과 슬픔 또한 환영할 일일런지도 모른다. 의미를 자꾸 부여해서 설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흘러와서 일어난 일들-이라며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삶 속에선 행불행의 구분보다는 태도가 더 중요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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