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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Nov 23. 2018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치유하는 ‘썰’

내가 책을 ‘고르는게’ 아니라, 책이 내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랬다. 도서관에서 노년기에 대한 책을 찾다가 책장에서 제목이 눈에 띄었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마크 윌린)


표지 디자인을 참 잘 뽑았다.

어디선가 코가 빠지면 그걸 알아차려 고치지 않는 한은 다음 단부터 코가 늘 모자라지거나 엉성해진다. 진짜 니트라면 풀어서 다시 뜰 수 있지만, 대가 이어지는 인생에선 시간을 다시 되돌려 잘못된 것을 풀어서 뜨는 일은 불가능하다. 늘어지고 빠진 코는 그대로다. 늘어지고 빠져버린 코가 상처와 고통의 트라우마라 한다면, 다음 단부터 우리는 그 고통을 그 단, 그 코의 것으로 남겨두고 코를 하나 더 뜨거나 줄이는 등 새로이 수선하여 다시 촘촘하게 짜나갈 수 있다. 주의깊게 보고 바로잡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의식중에 뜨개질이 계속되기에, 가족의 ‘무의식’을 물려 받아 코와 단은 그것대로 망가지고, 나중이 되어서나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그리고 내가 잘못된 존재인게 아닌가 하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쩔쩔매기 일쑤다. 하지만 책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It Didn't Start with You
- How inherited family Trauma shapes
who we are, and how to end the cycle.


책의 원제목이다.
이것은 ‘너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잘못 뜨기 시작한 코는 윗 단 어딘가에 있다. 내 트라우마는 윗 대 어디선가 일어난 일을 무의식 중에 내 상처로 받아들인 결과다. 유전자에 새겨지는 트라우마의 신호가 존재한다. 생쥐 실험을 통해 후생유전학에서 밝힌 스트레스 유전에 대한 부분도 나오지만,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는 것은 ‘트라우마의 무의식적인 공유와 재현’이다. 설령 내가 알지 못하는 트라우마라 하더라도, 가족 내에서 공유하는 가족 집단 무의식을 누군가가 받아들여 재현해낸다는 주장은, 칼 융을 좋아하는 내게도 조금 파격적이었다.


18세에 갖난쟁이 아이를 실수로 사망에 이르게 한 외조모의 트라우마는, 이모(외조모의 큰 딸)가 18세에 정신병으로 입원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사건은 가족 내에서 쉬쉬하며 비밀로 다뤄져 왔지만, 손녀는 18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상담을 받게 되고, 가족사에 흐른 고통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내가 받아들이기로 한 외조모의 고통이었음을 알게 되자, 미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간단히 예를 들면 위와 같은 식이다. 저런 사례만 모아서 구미에 맞게 편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몇 살 때 트라우마 사건이 일어났는지까지 중요시 여기고 연관성을 찾는 작업이 내겐 무리수로 느껴졌다. 하지만 ‘무의식을 공유하고 누군가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드러낸다’는 아이디어가 황당하기 보다는 무겁고 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카르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 작업을 위해서, ‘언어’가 중요하게 사용된다. 주절주절 말을 하며 분석한다는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핵심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을 소리내어 읽고 내 몸의 반응을 지켜보며 더 ‘깊이 닿는 핵심 언어’를 찾아낸다. 핵심 언어를 찾아서 추려나가다 보면 트라우마와 맞닿은 지점에 이르게 되고, 그것이 정말 내 것이 아니었음을 인지하며 내 고통을 보는 관점을 달리할 수 있다. 상처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내면아이 치유법 등과 비슷하지만, 상처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내가 갖게 된 ‘내 것이 아닌데 내가 가져와버린 잘못된 신념 찾기’에 주목한다는 점이 달랐다. 가족의 역사 내에서 트라우마가 재생되는 현상에 주목하고, ‘조상과 가족’에 대한 진한 유대를 회복하며 수용하고 껴안는 것을 보다 강조하기도 한다. 내면아이 치유가 부모 사랑을 못 받아 불쌍한 나!라며 자기연민에서 시작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을 이해하자고 끝난다는 점에선 비슷하긴 한데, ‘상처받은 나’를 강조하며 어린아이 달래듯 대한다는 점에서 유아적이고 에고적인 면이 있다. 반면 가족사에서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이를 ‘보내는’ 방식은, 내가 그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동시에 ‘내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으로 받아들일만큼 가족 누군가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트라우마 조상’을 감싸며 사랑과 애도를 보냄으로써 나를 감싸고 치유하는 감성적인 시도도 있다.

어린시절의 상처를 들이파며 내면아이를 달래는 방식은 강력하긴 하지만 자기연민 드라마의 주인공 놀이에 빠져버리거나, 부모탓에서 주저 앉아버릴 위험이 있다. 나만 알아달라 외치는 상태가 아니라 큰 맥락 속에서 나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성숙한 자세가 ‘치유’에 꼭 필요하다. 그 자세 자체가 치유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나 힘들고 쟤가 나빠요!하는 스토리에 매몰되는 한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내 상처를 충분히 보듬고 상실감을 꺼내어 애도하는 작업은 필수다. 이것 없이는 다음 단계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 이 단계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힘들어한다. 조심스레 예상컨대, 자기연민과 상처중독 상태에 머무르는 편이, 상대에게도 연민을 갖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용서해나가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내면아이 치유법’은 대중적 슬로건에 가깝고 학술적으로 연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나도 온갖 마음 치유 서적을 뒤적이고 상담도 받아본 적이 있지만, 내면아이를 다루는 방식은 초반에 진도가 막 나가는 느낌을 주는 반면, 뒤로 갈수록 마음이 허해지는 용두사미다. 자기연민+위로해주는 사람이나 집단에 의지하는 것이 치유된 것이라 착각하다가 나중에 달라진게 별로 없다는걸 알게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요즘은 너도 나도 힐러나 상담가를 자처하는 시대이기에, 위안을 받아가는 것과 실제로 치유가 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듣기 좋은 말에만 안주하기 쉽다. 위로를 주는 것과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홀로서는 정서적 독립’, ‘의존치 않는 성숙함’을 결과로 가져온다. 언뜻 서로 의지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회복이자 치유의 증거로 여겨지기 쉽지만, 부모로 인해 생긴 결핍을 채워줄 대상으로 다른 집단이나 개인을 선택한 것일 뿐인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부모와 유년 시절을 살피는 것은 필요하지만 거기 매몰되는 것은 과거에 사로잡히는 위험한 방식이라 여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뭐가 불편한지, 그것을 더 편하게 하려면 어떤게 필요한지를 스스로 찾아보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면 좋은 방식이겠으나, 어떤 식으로든 불쌍한 피해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누군가를 불행의 원천으로 삼는 방법은, ‘한꺼풀 벗겨져 달라 보이는, 하지만 결국 본질이 같은 상처 속에서 헤매는’ 위험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학계에서 다뤄지지 않는 것엔 다 이유가 있다.(석사 논문은 있지만 학술지엔 등장치 않는 방식)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이야기하는 트라우마의 유전과 치유도 마찬가지로 다소 비과학적이다. 그럼에도 리뷰를 쓰는 이유는, ‘대중적 치유요법’이나, 각종 자기치유나 힐링 요법 중에서 1) 가족내 상처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2) 내가 가진 패턴을 가족사라는 큰 비극 안의 흐름에 편입시켜 안전 거리를 확보하여, 3) 내가 잘못된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줌과 동시에 가해자를 포함한 가족을 연민으로 바라봄으로써 나를 크게 감싸안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치유를 위해 개인적으로 어떤 책 등을 택할 때  ‘위험도가 낮은 훌륭한 썰’이 되어주는 것 같다. 이것에는 동양적 관점에서 볼 때 카르마와 연관지을 법한 영적인 부분도 분명 존재하기에, 가족과 피의 유대가 진한 동양인에게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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