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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May 10. 2018

마음의 두 작용, 교감과 반감

아이가 떼쓰는 것도 반길 수 있는 이유

마음은 언제부터 생길까. 마음이 뭔지도 정확히 모르니 발생시점을 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동양에서는 오장육부에 깃든 기운이 감정을 만들어낸다 하고, 서양에서는 두뇌의 화학작용이라 한다. 영혼과 자아가 등장하기도 하고, 에고와 참나 운운하기도 한다. 결론은 알 수 없고, 알 수 있는 것은 뭔지 모를 마음의 작용으로 감정이 요동치기도 하고, 몸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것, 인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것 정도다. 그 마음이란 놈이 본격적으로 작용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떼쓰기와 함께.

슈타이너 인지학에는 ‘교감’과 ‘반감’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물을 대하는 마음의 두 작용을 나타낸다. 책에는 공감과 반감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공감하다’와 좀 다른 것이기에 교감으로 적는다. 사실 교감도 정확치는 않다. Sympathy와 Antipathy로 쓴다는데, 동정이나 연민, 거부감을 느끼는 반감 등은 좁은 의미일 뿐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교감 혹은 공감은 대상과 융합하려는 힘이고, 반감은 대상과 대치하여 분리 속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구분하려는 힘이다. 연민이나 거부감같은 감정적인 뜻으로 이해하면, 의미가 한정되어 인간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태도를 담아낼 수가 없다. 교감은 호감, 반감은 비호감인 것도 아니다.

아기는 교감을 풀로 가동하는 상태다. 나와 사물의 구분이 없이 세상을 몸 전체로 감각하여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느낀다. 그래서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피부의 촉각으로 첫 ‘분리’를 경험케 한다. 촉각을 통해 경계를 알아 첫 반감 경험을 하게 하는 셈이다. 한동안 아기는 교감을 사용해서 세상을 배워간다. 뭐든 함께 하려하며 입으로 가져가고, 대상에 대한 정보도 인상도 없으니 꽃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꽃을 느끼고, 엄마를 보면 있는 그대로 엄마를 원하고 느낀다. 아기의 욕구는 엄마의 보살핌으로 ‘자동으로 충족되는 것’처럼 보이고, 아기 입장에서는 반감을 사용할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다 상호작용 속에 놓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욕구가 지연되는 상황(제때 먹고 자지 못하거나, 기저귀가 축축하거나 등)이 오거나, 부모가 즐겁게 놀아주거나, 신기한 장면를 보고 흥미가 동하는 등의 상태를 겪으면, 싫다거나, 좋다거나, 재밌다거나 하는 등 자기 상태에 대한 특정한 인상(image)이 생긴다. 요컨대, 외부의 사건이 내 안에 ‘뭔가를 일으킨다’. 마음이 존재를 드러내는 셈이다.

뇌가 발달하면서 아이는 더 많은 것을 인식하게 되고, 반감 또한 구체적으로 바뀐다. 내 몸의 쾌감/불쾌감이나 주변 사물에 반응하는 것 정도에서 벗어나, 나의 의도나 생각, 감정이 조금씩 자라면서 반감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어렴풋이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는 다른 나’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 ‘나’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하더라도 ‘내가 할래’라던가 ‘싫어’, ‘아니야’ 등의 자기주장을 하게 된다. 마음, 초보단계의 에고가 들어섰다는 증거다. 그러니 이 시기의 아이는 떼쟁이에, 무조건 싫다고 하고 본다. 외부와 구분되는 나를 주장하며 자신을 매순간 확인하는 행위다. 그렇게 외부와 ‘나’를 구분하는 힘이 반감이다.
딸기를 먹고 맛있어서 좋아하게 되는 것 또한 반감의 작용이다. 딸기라는 대상을 내 안으로 가져와서 자기만의 라벨을 붙이고 대상화하는 작용이기에 그렇다. 딸기를 먹는 순간 그 향과 맛에 완전히 몰입하면서 온몸으로 딸기를 느낀다면 그것은 교감의 작용일 것이다. 꽃향기를 맡을 때 우린 교감을 사용하고, 그 꽃이 예쁘다거나, 꽃 색깔이 어떻고 이름이 무엇인지를 인지할 때는 반감을 사용한다.

우리네 인지교육은 반감만을 사용하게 이끌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교감하는 법을 거세시킨다. 날아가는 나비의 궤적을 따라가고, 팔랑대는 날갯짓을 넋놓고 보는 몰입의 순간을 충분히 허락하지 않고, 쟤는 나비인데, 흰날개를 가진 배추흰나비이고, 알을 배춧잎에 낳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이다. 습식수채화도 색이 번지는 것을 보며 색 그 자체와 섞이는 모습에 푹 젖어 교감의 힘을 쓰게 하는 효과가 있다. 부드럽게 번지는 색에 빠져드는 것이다. 노랑이와 파랑이가 만나 초록이가 된다는 이야기를 붙이는 것도 교감에 판타지를 더해 내면에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발랄한 말투로 ‘빨강 노랑 섞으니 주황이 되었어요!’라고 ‘재미있게’ 놀이하며 체험한다는 류의 접근은 ‘빨강+노랑=주황’이라는 도식을 알려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감만을 사용하는 아쉬운 교육이다. 반감 교육만 받아온 나로서는 인식 전환이 쉽지 않다.
요새 꽃밭을 가꾸면서 시도하는 것 중 하나가, 꽃 정보를 찾지 않고 되는대로 심고 길러보기인데, 원예나 화훼의 본질은 ‘생명력 느끼기’이지 내 통제 하에 ‘관리’하거나, 예쁘게 데코레이션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르니 집중하게 되고, 모르니 교감하게 된다. 호기심이야말로 가장 큰 학습동기다. 꽃이나 잎의 상태를 느끼고, 싹이 나는 모습을 보고, 그 다음을 생각한다. 참 비효율적이고 무식한 방식인데, 반감 위주로 써온 나도 교감을 해보고 싶어서 도전 중이다. 손가락은 검색창에 자꾸 가지만 말이다.

아이가 ‘아니야!’, ‘내가 할래!’ 라고 우긴지는 몇 달 되었다. 나라는 개념을 아직 알 것 같진 않은데, 자기 이름을 대거나 ‘내가’라는 말을 쓰며 혼자 칫솔질 등등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이리로 간다 저기 가보겠다 하며 고집스레 내 손을 잡아 끌고 다니다가, 다른 방향으로 가자고 하면 힘을 주고 버틴다. 그러다 안되면 떼를 쓴다. 대상과 상황에 마음을 쏘아 반감을 열심히 일으키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거기에 따라 나도 반감이 일어난다. 이렇구나 하고 판단하고, 내 조바심과 귀찮음으로 짜증이 나기도 한다. 어제도 한시간 반(으아...)이나 산책을 했는데 아이의 호기심을 따라 잘 다니다가 막판에 내가 지쳐서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노는 교감을 뒤로 하고 반감을 풍풍 일으키고 말았다. 반감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단, 놀 때 필요한 것은 교감이긴 하다.

아무튼, 송이는 반감을 열심히 쓰며 자기주장도 하고, 세상 사물에 이름을 붙여 자기 안으로 데려간다. ‘까치 뭐해!’, ‘숟가락 뭐해!’ 하며 궁금한 것도 많다. 일단 뭐하냐고 묻고 본다. 답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냥 발견한 것들이 무엇인지, 어떤 인상이 되돌아오는지 확인하는게 중요한 것 같다. 튕겨져 나오는 공을 받기 위해 벽에 계속 테니스공을 던져대는 것 같달까.
여기 벽이 있어, 저기에도 벽이 있어, 내가 던지면 다시 되돌아와! 난 공(반감)을 던지는걸 통해서 벽(세상)을 알게 되어요! 라고 하는 듯 하다. 떼쓰기는 그래서 반길만한 일이고, 세상을 잘 배워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 떼가 과해지지만 않는다면. 과한 떼쓰기는 던진 공이 회수되지 않고, 세상을 탐구하려는 시도를 무시 당해서 생긴 분노와 좌절감의 표출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뭐든 설명해주는게 중요한 것 같다. 무턱대고 못하게 하기 보다, 알아듣건 못듣건 진지하고 친절한 느낌을 담은 설명이 아이에겐 ‘되돌아오는 공’으로 느껴지는 듯 하다. 물론 내 쪽이 꽤 느긋해야 가능한 피드백이다. 그래서 어렵다. 느긋하려면 그라운딩이 잘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일상과 생각에 쫓기는 현실 속에선 쉽지 않다. 그러니 내가 여유 있을 때 할 일이다. 내 맘이 급할 때 하면 서로 기운만 빠진다. 좋은 타이밍에 아이의 호기심과 진하게 교감하면, 그 후에 내 짬이 생긴다. 확실히 아이가 혼자서도 더 잘 놀고, 핸드폰이나 tv에도 관심을 덜 보인다. 흐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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