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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Feb 14. 2019

인간 영혼의 발달

슈타이너의 인지학 관점에서

* 출처 : Dr. Simon Bednarek, <Spiritual Medicine: Healing of One's Own Destiny>, Bangkok Feb. 2012



슈타이너의 인지학에서는 7년마다 인간이 의미있게 발달해간다고 한다. 7이 의미있는 이유는 수비학,영지주의 쪽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우주의 완성수라 그렇다. 슈타이너는 물질 세계를 영적으로 관조하는 이였기에 인지학엔 이런 관점이 많이 등장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숫자엔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리듬으로서 의미는 받아들여 뭔가 맞추긴 해도 숫자 자체에 집착하진 않으려 한다. 무지개의 7색도 7에 맞추어 남색을 굳이 찝어낸 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위해 세상을 재조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그래프에서 ‘정말 그러하다!’고 취하게 되는 것은 빨간 커브, 즉 영혼발달곡선이다. 파란 곡선은 육신의 발달을 의미한다. 태어나서 쭉 상승하는 육신은 성인기에 가장 활기차다가 사그라들어 죽음으로 향한다. 나는 저 곡선의 양끝에 있는 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다. 내 딸은 호기심이 넘치고, 생명력으로 가득하며, 존재 자체로 빛을 뿜어낸다. 팔십 중반의 아빠는 세상에 관심이 없고, 죽음의 에너지에 쌓여 있으며, 육신이 마치 블랙홀처럼 어둠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반면 영혼(연두색 곡선)은 육신과 반대로 작용한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가장 영적이고, 가장 영혼다우며, 순수하고 사랑이 넘친다. 그 영혼이 물질세계에 내려와 육신을 입게 되는 것을 ‘육화’라고 하는데, 육화가 잘 이루어지면 이 세상에서 감정 경험을 다채롭게 하면서 영혼의 공부를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육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체, 감정, 정신 각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육화를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일을 대리하는 것과도 같다 했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리고 자기 때가 와서 육신을 떠나게 되면 탈육화하여 다시 영혼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게 인지학에서 보는 인간의 여정이다.

하지만 개개인은, 빨간 곡선을 따른다. 자기의 그릇과 경험, 자아체를 얼마나 깨우느냐에 따라 탈육화하는 동안 인간 정신이 영혼처럼 상승할지(1), 육신의 그것을 따라 정신적으로도 ‘추락’할지(2), 성숙기에 어느 정도 장만한 밑천으로 평범하게 그럭저럭 마지막을 맞을지(3)가 달라진다. 슈타이너는 인간이 (1)처럼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향해 정진하길 권했다. 유명한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도 표현이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한다. 카를 융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자기실현과 영적인 성장이 인간 생의 목표이자 의미라는 것이다.

방향성을 갖고 삶을 진실되게 사는 것은 좋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자꾸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그 경향성은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왜 뭔가 업그레이드하거나, 상위의 무언가를 좇으려 하는가. 재밌는 사실은, 슈타이너가 활동할 당시 철학 사조에 ‘진화론’이 영향을 많이 주었다는 점이다. 당시 진화론은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물이고, 자연의 법칙은 더 상위로 발전하는 형태로 진행한다’는 식의 사조를 심어주었다. 진화론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한 이들은 진화가 곧 방향성을 갖고 변해가는 ‘진보’라 여겼다. 게임 캐릭터가 레벨업하듯 위로 올라가면 뭐가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 진화생물학을 들여다보면, 진화는 적응과 무작위의 짬뽕이다. 어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뭔가가 발달하고 뭔가는 퇴화한다. 그런데 그게 개체에게 ‘더 훌륭하고 발전되는 방향’이라는 보장은 없다. 불편하더라도 당장 그렇게 살아야하니 그 모양새, 그 기능으로 변한 것이다. 진화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단, ‘삶에 치열하게 적응하는 아름다움’이 있을 뿐, 진화가 곧 개체의 ‘진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목적론적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인 이들은, 영적인 측면에서도 자꾸만 ‘상위로 진화하여 해탈하거나 천국에 이르는’ 식의 ‘레벨업 게임’을 설정하고 고수가 되길 추구했다. 마치 요즘의 양자역학이 영성계에서 현실창조 기타 등등으로 변형되어 실제와 다르게 (편할대로) 활용되는 것처럼, 진화론이 본질과 상관없이 오용된 셈이다.

위를 향해 발전, 진화, 영혼의 성장...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분명 그런 부분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거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 무의미한 애벌레 기둥
<꽃들에게 희망을>을 안 본 사람은 별로 없지 싶다. 이 책에 나온 애벌레 기둥이 떠오른다. 뭘 위해선지,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꾸 위로 오르려하는 애벌레들. 저 그림이 담고 있는 ‘상승욕구’가 떠오른다. 영혼의 진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온갖 수행을 하고 정신세계를 추구한들, 그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비가 되는 법은 영혼 레벨업 게임에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슈타이너도 고차원의 인식을 강조했지만, 그것만을 좇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고차의 인식을 하되 감정과 손발의 의지 실행에까지 모두 스며나오도록 하는 삶 자체를 강조했다.

책 속 노랑애벌레는 나비가 되었다. 줄무늬 애벌레는 애벌레 기둥에서 위로 올라가려 했다. 노랑애벌레는 줄무늬 애벌레를 사랑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고, 고치가 되는 두려움을 기꺼이 껴안아 ‘땅에서’ 나비가 되는 법을 알았다. 더 거창한 것, 그럴싸한 것, 상위의 것이 있을거라 믿고 벌레 기둥에 뛰어든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의 삶을 알지 못한 채 다른 것을 좇았다. (무지에 빠진 우리네 같다) 결국 줄무늬 애벌레는 벌레 기둥이 그저 두려움과 무지의 덩어리인 것을 알고 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의 인도를 받아 자기의 고치를 틀게 된다. 요나의 고래 뱃속 이야기 원형처럼, 자기만의 하강의 길에 들어 죽음을 겪고 재탄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 성장은 고치가 되는 길, 즉 하강하여 내적 죽음을 겪고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융은 자기실현을 연금술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 연금술적 마법은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어쩌고 하는데에서 오는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그 안에서 두려움이 아닌 사랑을 택하고, 비겁함이 아닌 정의로움을 택할 때 일어난다. 자기 삶과 유리된 현장에서 연금술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금술사의 실험실은 나 자신의 내면이지 외부 그 어딘가가 아니다. 파랑새를 찾으러 간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결국 다락방에서 파랑새를 찾았다. 그들의 여행은 그 자체가 공부였다. 거친 여정을 겪어내야 내 안의 파랑새, 현자의 돌을 찾아낸다.

인간영혼의 발달은, 그래서 담금질을 통해 이루어진다. 누구나 편하고 팔자 좋고 세속적인 ‘복받은’ 삶을 꿈꾸지만, 영혼의 입장에서는 나태이고 추락일런지도 모른다. 레벨업해서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삶에서 내가 한껏 느끼고 겪으며 스스로의 그릇이 깊어질 때, 나는 성장한다. 상승이 아니라 깊고 넓어지는 과정이다. 상승 패러다임은 버릴 때가 됐다. 얼마나 현존하는가, 얼마나 생생하게 느끼고 경험하는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현존도,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며 평안만 추구하는 현실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괴로움을 깊이 느끼는 것도 현존이다. 그걸 지켜보고 ‘나는 괜찮은 상태이길 바라는 것’도 현존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불안정한 그대로를 느끼고 내버려둘 수 있는 힘이 곧 현존 능력이다. 에소테릭한 내용들, 현대의 뇌과학, 몸을 통해 나를 지켜보는 알아차림 기법, 그라운딩, 인생 자체, 지금 여기. 모두 통하는 바가 있다.

누구나 삶을 꿰어내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정신없이 바느질을 하며 구멍을 메우느라허둥대기 일쑤지만, 내가 바늘땀을 꿰어 올리는 직물이 무엇인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알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인간 영혼은 그 과정에서 아름답게 피어나고 또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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