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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Mar 11. 2019

질병을 보는 관점

루돌프 슈타이너의 ‘질병과 카르마 강의’ 중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는 생애 마지막에 가까울 때 카르마에 관한 강의를 많이 했다고 한다. 발도르프 교육에도 카르마론이 기저에 있는데, 대부분은 이를 받아들이기 낯설어하기 때문에 방법론적으로만 이해하거나, 핵심에 닿지 못한 채로 시행하여 교사가 자기공부에 게으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심지어 발도르프 교육자도 특정 관점을 크라울리 등의 마술류 오컬티즘과 같은 부류로 묶어 버리는 무지를 저지르기도 한단다.

질병과 카르마라고 할 때, 오해하기 쉽지만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이는 결코 단죄하거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내용이 아니라는거다. 불교적 관점에서 잘못 알려진 카르마론은 전생에 뭘 잘못하면 현생에 어느 부위에 무슨 병이 생긴다는 식의 유치한 매칭인데, 이는 하느님 안 믿으면 불지옥에 간다는 수준의 유아적인 관념이다. 슈타이너는 질병과 치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했다.


 



A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보니 방 안에 파리가 가득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방이 매우 더럽기 때문이다.



방 곳곳의 오염때문에 파리가 들끓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일단 방을 청소하면 파리는 없어진다. 그래서 누구나 이것이 합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B는 다르게 말한다.

파리가 많이 있는 원인은 그 방에 예전부터 너무 게으른 여자가 살고 있어서다.



그러자 A가 반박한다.

게으름을 일종의 인격처럼 말하는 것은 끔찍한 미신이다. 게으름이 신호를 하면 파리가 몰려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파리가 있는 것은 방이 심하게 오염된 탓이다.





이 문제와 유사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병이 난 것은 병원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몸 속의 균을 쫓아내면 병은 치유된다. 더 뿌리 깊은 곳에 영적 원인이 있다는 등의 생각은 미신이다. 병원균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




파리는 질병, 오염물은 병원균, 방주인의 게으름을 토양이라 할 때, 슈타이너는 병원균에만 주목하는 현대의학의 사조를 비판하고, 질병의 토양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방을 치워 파리가 오지 않도록 한다 해도, 언젠가 방엔 다시 파리가 꼬일 것이다. 방주인은 계속해서 방을 더럽게 사용할 것이고, 파리를 ㅅ불러 들이는 오염물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슈타이너가 활동하던 때의 의학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지만 백여년 전이었음을 감안하면, 지금보다도 더 인간을 ‘분해하는’ 시선으로 봤으리란 것을 알 수 있다. 모더니즘 시대이기에 분해와 분석이 미덕이던 때였다. 지금 의학도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잘 모르겠는 모호한 부분에 대해 ‘신경성’, ‘스트레스성’ 등의 이름을 붙여 오염물에 물리적인 것이 아닌 다른 영역의 것을 슬쩍 끼워넣고 있는 실정이다. 파리가 있는 방의 비유를 응용해서 현대적으로 다시 각색하자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A가 말한다.

환자의 위점막이 헐어 있다.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많이 먹어 소화에 무리를 주기 때문이다. 환자는 스트레스를 매운 음식을 먹는 것으로 푼다. 식단 조절과 스트레스 조절이 필요하고 위점막을 보호하는 약을 복용하면 된다.



매우 합리적이다.
그런데 B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위점막이 헐어 있는 이유는 환자가 작은 것에도 감정의 동요가 크기 때문이다.



개인의 감정을 병의 원인이라 하는 것은 끔찍한 미신이다. 감정이 위벽을 헐어내기라도 한단 말인가. 위벽이 헌 것은 자극적인 음식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인과의 연결 고리를 하나 더 찾아 들어가는 것, 어떤 사람의 건강 상태를 이전의 행위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카르마적 관점에서의 고찰이다. 이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행위이지, ‘잘못했으니 벌로써 병이 온다’ 같은 류의 것이 아니다.

이 관점은 사지체(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체)의 이해와도 맞물려 있다. 육체는 지구에서 받은 물질몸이다.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은 모두 육체를 갖고 있다. 식물은 에테르체까지 갖고 있다. 생명력을 의미하는 에테르체는 손상되면 복원하려는 성질을 가진다. 그래서 식물은 잘라내면 그 부분에 다시 줄기가 나고 잎이 자란다. 식물의 가지치기나 생장점 위를 잘라주는 것 등도 식물의 에테르체가 작용하여 새로이 그 부분을 채우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식물은 정해진 모양이 없다. 유전자에 새겨진 모양은 있지만 뻗어나가는 모양새는 자유롭다. 동물이 정해진 모양 이상으로 변형되지 않는 것과 다르다. 동물의 경우도 하등동물인 경우 식물적 속성을 갖고 있어 자르면 에테르체에 의해 모양을 기억하고 있다가 복원하는 것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잘라본 플라나리아 등이 그렇다. 고등동물은 아스트랄체를 갖고 있다. 아스트랄체는 감정체로, 외부 세계를 받아들여 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감정경험이 중요하다. 포유류, 개과, 고양이과 동물은 아스트랄체의 작용으로 초보적인 감정을 갖고 자기 행동에 변화를 준다. 예쁨 받은 개가 주인을 좋아하고, 학대 받은 개가 상처 받아 주눅이 드는 등의 감정 경험이 내면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스트랄체의 작용이다. 이렇게 외계의 경험을 내적으로 체험하려면 생명력인 에테르체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식물같은 재생력을 가질 수 없고, 감정 경험을 내면화하는 것에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동물은 내생적(몸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인지학적으로 말하면, 질병은 아스트랄체가 몸에 깊이 스며들어 과도하게 작용할 때 온다.
인간의 경우, 감정이 매우 복잡하고 저차원부터 고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아스트랄체의 작용이 동물의 그것보다 활발하고 막강하다. 그 작용이 활발한만큼 생명력에 해당하는 에테르체의 협조를 더욱 필요로 하고, 육체를 치유하는 힘을 가져다 감정경험을 처리하는 것에 더 많이 사용한다. 생각과 감정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것이 부정적일수록, 에테르체의 소모가 커지고, 몸 자체의 치유력(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질병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인지학에서 말하는 질병의 메커니즘이다.

요는 에너지의 분배에 있다. 내 몸에 작용하는 치유력, 생명력이 내 감정경험을 처리하는 것에 과도하게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뿐 아니라, 긍정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이에 과도하게 몰입되는 것은 불균형을 낳는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학을 터부시하거나, 에너지적 접근만 근본으로 여긴다면 이 또한 불균형이다. 약물이 근본적 치료가 되지 못함을 알고 개인의 의식 차원에서도 함께 치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 다 끊고 의식만으로 뭘 하겠다고, 혹은 그래야한다고 주장한다면 뒤틀린 의식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질병을 퇴치할 대상으로만 보고, 환자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감정 등에 무관심한 현대의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통합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이 필요한 때다.

- 일부 1910년 5월 18일, 루돌프 슈타이너 강의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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