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마 Jun 26. 2019

[블랙미러] 스미더린 - 연결에 실패한 사람들 (스포)

가짜를 얻고 진짜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택시 운전을 하는 크리스는, 굴지의 SNS 기업인 스미더린 앞에서 늘 대기 중이다. 스미더린 직원을 태우기 위해 계획적으로 근처에서 콜에 응하던 그는 손님이 스미더린 직원이 아닐 때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상처 치유 모임 등에서 사연을 나누며 지지하는 그룹에서도 그는 말을 아낀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과 밤을 지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여성은 자기 딸의 SNS 계정의 비밀번호를 알기 위해 매일 '의미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단어'를 조합하여 로그인 시도를 하고 매번 실패한다. 그녀는 죽은 딸이 왜 그랬을지 진실을 알고 싶어하며,  로그인에 집착한다. 그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크리스에게서도 같은 상처가 읽힌다.


그러던 어느날, 말쑥한 정장을 입은 스미더린 직원이라는 사람이 손님으로 승차한다. 흥분과 긴장, 초조 등 복잡한 심경이 그의 눈빛에 흐르고, 크리스는 곧 오래 준비해왔던 계획을 실행한다. 그것은 바로, 스미더린 직원을 납치, 협박하여 CEO인 빌리 바우어와 통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왜 스미더린 CEO와 그토록 간절히, 그리고 광적으로 통화하고자 하는 것일까? 도입부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셜록의 모리아티 역으로 유명한 배우의 연기도 한 몫했다. 아무튼 크리스는 납치한 스미더린 직원을 총으로 협박하여 회사에 전화를 걸도록 한다. 하필 직원은 그저 인턴 사원일 뿐이었지만, 인사팀 상사와 통화하게 되어 사태가 커지게 된다. 경찰, 스미더린의 임원진까지 모든 사태를 알게 되고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과 대응은 느리고, 협상전문가의 말도 통하지 않는다. 되려 SNS 정보를 알고 있는 스미더린 측에서 고급 정보를 더 빨리 알아내어 상황을 장악해나간다. 자기 안위 따위는 상관치 않고 오로지 CEO 빌리 바우어와의 통화만을 바라는 크리스의 히스테릭한 돌발 행동들로, 결국 빌리 바우어에게까지 연락이 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빌리 바우어는 디지털 디톡스를 하며 묵언수행 중이었다. 임원진들은 대응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FBI나 변호사까지  불러 들이지만, 빌리 바우어는 다 필요없다며 직접 통화를 하기로 한다. 빌리 바우어는 크리스에게 모든 것을 듣는다. 그저 듣는다.

크리스는 사랑하는 약혼녀를 '스미더린'때문에 잃었다. 망할 SNS에서 별 것 아닌 피드백 알람이 울려 이를 확인하느라 한눈을 판 사이, 차사고가 나서 옆자리에 있던 약혼녀가 사망한 것이었다. 그 후 충격과 실의에 빠진 크리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 모든 것을 스미더린의 CEO에게 이야기하고 자살하겠다는 열망을 키우게 되었다.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빌리 바우어는 그저 유감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그 연결은 진짜 연결인가?


히스테릭한 크리스의 대사에서도, SNS의 별것 아닌 피드백을 확인하느라 차사고를 냈다는 설정에서도, 차갑게 도려내듯 쏘아 붙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까짓 남의 좋아요가 뭐라고 혼을 팔고 다니는가'하는 일갈을 맞는 듯한 기분이었다.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각자 핸드폰을 들고 SNS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은 길가의 풍경이나 주변 사람, 바로 눈 앞의 일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액정 속 세상에 관심을 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사실은 연결을 잃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가까이 지내게 해줄 것처럼 굴었던 SNS는 연결을 끊어 버렸다.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쉽게 이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놓치게 해버렸다. SNS 속 잘 모르는 사람의 반응을 보느라 가까이 있는 이와의 시간에 충실하지 못한다. 타인의 사소한 관심(좋아요나 코멘트 같은)의 양이 관계의 질을 측정하는 척도처럼 되니 깊이가 있을리가 없다.


그 연결이 가짜임을 알아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시스템이 서비스 곳곳에 녹아 있다.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라며, 누가 당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당신의 관계망에서 소외되지 말라는 듯 타인은 어떻게 댓글을 서로 달아주고 있는지까지(최근의 페이스북은 누가 누구한테 댓글 달았다는 쓸데 없는 것까지 알려주고 있다) 꾸역꾸역 음식물을 처넣듯 띠롱대며 알려온다. 거기 응하지 않으면 소외되기라도 할 것처럼 굴며 불안을 자극한다. 그 불안에 진 사람들은 SNS에 중독되고, 타인의 얄팍한 피드백에 좌지우지된 채 정말 소중한 연결을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남의 욕망을 욕망하느라 외로워진 사람들


SNS 댓글을 확인하느라 한눈을 팔아 사고를 내고 약혼녀를 잃었다는 설정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별 것 아닌 남의 시선이나 반응에 연연하느라 정말 소중한 것을 잃고 있다는 은유로 이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바닷가의 해돋이를 봐도 조용히 이를 음미하기 보단 핸드폰 사진을 찍기 바쁘고, 소중한 아이의 재롱잔치도 맨눈의 감각이 아닌 액정 화면을 통해서 보는 세상이다. 지긋이 보고, 충분히 음미해서 가슴에 담아두기 보다는 사진을 찍어 다른 이들에게 '나 이런 것 했어요!'라고 알리는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나 자신과의 연결을 잃어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 어떤 경험도 내 세계에 들어와 내가 소화해야 내 것이 된다. 내 세계에 들어와 녹아들기도 전에 일단 찍을 생각부터 든다면, 머리 속에 남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면, 그 순간 그 장소, 그 사람과 있는 시공간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남인가 나인가? 남의 반응이 내 행동의 동기를 지배한다면 그것이 내 삶일까? 남의 욕구에 반응하며 사는 이들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는 스미더린의 CEO인 빌리 바우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디지털 디톡스를 한답시고 묵언수행 중이었다. 너무나 많은 피드백과, 주변 임원진들의 참견에 진저리가 나있는 상태였다. 서비스를 만든 것은 자기인데, 처음 생각과 달리 배는 산으로 갔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중독되어 서비스를 떠나지 못하게끔 하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서비스에 적용되었고, 서비스가 사람들을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들어가는 동안, 그 역시 정신을 못 차린채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물론 재벌이었지만.


결국 임원진의 권고를 다 뿌리치고 내 맘대로 통화하겠다며 크리스와 연결된 빌리는,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한다. 아무런 연결이 없는 생면부지의 남의, 가장 아프고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애도하고, 안타까워한다. SNS 친구랍시고 연결된 이들의 가짜 관계와 대조적으로,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정말 자기를 드러낼 수 있었다. 크리스는 지금껏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숨겨왔던 죄책감과 고통을, 빌리는 '뭣같이 변해버린 서비스'에 대한 씁쓸함을 이야기한다. 크리스는 진실을 말하고 편해지고 싶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편할 수 없었던 그는 납치극을 통해 진실을 토해내고 떠나고자 했다.  

우리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우린 그저 서로를 되비추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SNS를 위시한 가상세계의 알고리즘은 이를 더욱 강화한다. 타인의 피드백을 위해 내 행동을 조정하게 되는 무서움이 이 세계 안에 있다. 그리고 당분간 사람들이 여기서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정말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할 곳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반대로, 나답지 않은 짓을 계속 해야 하는 이상한 굴레를 벗어던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의 얄팍함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이상한 시스템이 돌아가는 이유는 아마도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속내의 이야기를 터놓고 싶고, 공감받고 지지받고 싶은 결핍된 마음이 우리를 그 안에 붙들어 매두는 원동력일게다.


가짜 연결을 버리고 진짜 연결을 찾을 때


간만에 본 블랙미러 시리즈는 예전 것들보다 서사가 더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전같은 쇼킹함, 자극적인 신선함 등은 덜했다. 그럼에도 <스미더린>은 현실과 밀접하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던져놓았다.


연결. 


나는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가?

내 몸의 감각을 잘 느끼고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받는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소중한 타인과 함께 하는 시간에 오롯이 집중할만큼 연결되어 있는가?

중요치 않은 타인과의 있으나마나한 교류를 위해 내 에너지를 산만하게 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정말, 관계 속에 제대로 연결된 채 살고 있는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나의 결핍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여러가지 질문을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였다. 나도 디지털 디톡스나 하러 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질병을 보는 관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