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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Sep 09. 2016

어떤 항해

홀로 배를 탄 사람의 일지


1.
나는 여행을 떠났네 친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배를 몰고 있더군.
이쪽 대륙에서 저쪽 대륙으로 가는 것이 내 임무일세.
목적지에 다다르면 무엇이 있는지, 육지가 있기나 한건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반대편에 닿는다고 하는걸 보니 있긴 한 모양이네.
내 손에는 흔한 지도 한 장 없고, 함께 여행할 사람도 없네.
이 바다와 배 위에서 난 혼자야.
하지만 육지에 가면 나같은 사람들이 많을게 아닌가?
누가 말해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처럼 여행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육지에 가면 모두 만날 수 있다고 들은게 기억나네.
난 이 여행이 지긋지긋해. 어서 사람들을 만나 맥주라도 한 잔 들이키고 싶구만.

2.
대개는 날씨가 좋지만, 때로 하늘이 잔뜩 성을 낼 때가 있지.
그런 날에는 잔뜩 움츠리고 있어야 한다네.
천둥번개라도 치는 날엔 가만 있는게 상책이지.
파도에 맞아 배가 부서질 뻔 한 것도 한 두번이 아니야.
그래도 그럭저럭 잘 해왔네. 아직 내가 이걸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지.
오늘은 날이 흐리고 파도가 높은게 영 불안해.
낚시는 커녕 배만 무사해도 좋겠어.

3.
오늘은 기막힌 날씨야!
해도 적당히 뜨겁고, 바다는 잔잔해.
물고기도 무려 세 마리나 낚았어. 팔뚝만한 놈들이라 꽤 오래 먹겠어.
이렇게 좋은 날도 있다니 이 여행도 할만하구만.

4.
한동안 아무것도 못했어.
키 하나가 부러졌거든. 사실 지금 한쪽으로 배가 기울어진 상태야.
고치려면 고칠 수 있겠지만 폭풍에 치여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네.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이 망할 바다는 왜 이다지도 잔인하단 말인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이 진저리나는 여행 따위를 그만둘 수 있을텐데...
아무 낙도 없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죽어버린다면...

5.
어제 굉장한걸 발견했어!
병 안에 종이가 들어있었네. 사람이 뭐라고 휘갈겨쓴 종이야. 사람이!
처음 그걸 발견하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할걸세.
마음이 급해서 손까지 떨리더군. 결국 못 참고 병을 깨서 종이를 꺼내버렸네.
그 종이에는.. 나와 똑같은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 쓴 편지가 들어 있었어.
그 친구도 나처럼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었네.
거기에는 '이 병을 발견한다면, 병이 흘러온 곳으로 오세요. 나도 병이 흘러간 곳으로 갈테니'라고 써있었어.
정말 놀라운 일이지! 이 지독히도 외로운 여행길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난다는건 기적같은 일이라고!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이 흘러온 곳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네.
어차피 지도 따위도 없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개같은 항해길이 아닌가!
그가 있는 곳이 내가 갈 곳이라는걸 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네.
제발 그와 내가 만날 수 있기를!

6.
대체 그 사람은 언제 만날 수 있는걸까?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빌어먹을 바다지만 자꾸 쳐다보게 되는건 나도 어쩔 수가 없군 그래.
혹시 저 멀리서 돛이 보이진 않을지, 병이 또 떠오르진 않을지 말일세.
오늘은 오후 내내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어.
짧은 글귀지만 이걸 통해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해보는게 너무 즐겁거든.
이렇게 편지를 넣어 병을 던질 생각을 했다니 그 사람은 참 낭만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일거야.
이 날씨에 투덜대며 죽어버릴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말이지.
군더더기 없이 할말만 딱 적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어.
앞뒤 재지 않고, 조건을 달지도 않고 그저 오라고만 하지 않나.
세상에 이렇게 단순명료하고 아름다운게 또 있을까?
어느새 난 이 글을 쓴 사람의 생각만 하고 있어.
머리 속에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이 들어오질 않네.
그 사람도 나에게 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아.
같은 별을 보고 있을거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 같네.
아, 내가 요즘 날씨에 대한 이야길 했던가?
파도 쯤이야 뭐. 얼마 전 부서진 키도, 구멍난 배도 판자로 다 메웠어.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배가 튼튼해야하지 않겠어? 어쩌면 같은 배에 탈지도 모르지.
하하하. 참 즐겁구만.

7.
일주일이 지난 것 같은데, 그 사람이 탄 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만.

8.
난 틀림없이 병이 온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거지?
그만큼 창의적인 사람이면 불꽃을 쏘아 올리거나 병을 하나 더 던질 수도 있는거 아닌가?
이제 보니 낭만만 알았지 융통성이라곤 없는거 같군.
일단 방향을 틀어서 가보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만나긴 그른 것 같아.

9.
물고기 다섯 마리.

10.
파도가 높아서 뱃머리 장식이 부러졌어.
어차피 봐줄 사람도 없긴 하지만 기분은 더럽군.

11.
어쩌면 어떤 미친놈이 장난질을 친게 아닐까 해.
나같은 병신이 걸려들어서 희망을 가지라고 말이지.
망할 자식. 저주나 받으라지.

12.
한도 끝도 없는 바다다.
갈매기 한마리가 나는걸 보고 육지가 근처에 있는게 아닐까 했지만
그 무엇으로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13.
꿈을 꾸었다네.
정말 이상한 꿈이었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어.
그건 마치..투명하고 커다란 물덩어리같았지.
내 몸이 이상해지니 덜컥 겁이 나서 펑펑 울었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어.
비가 오자 또 다른 내가 휘청이면서 키를 잡았어.
바로 어제 내가 했던 것처럼 말이지.
도리질을 치면서 발을 굴렀더니 파도가 일었어.
배가 크게 흔들렸어.
내가 바다더군.
내 몸 위에 내가 탄 배가 있었어.
기분이 엿같았지.

14.
혹시 이 바다도 다른 놈의 몸둥아리인건 아닐까?

15.
아무래도 난 미쳐가나봐.
아무도 없으니 그럴법도 하지.
이젠 내가 뭔지도 모르겠어.
궂은 날씨도 출렁대는 바다도 비현실적인 것 같아.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거지?
난 내가 배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가만 있어도 물이 배를 실어다주고 날씨가 배를 말리기도, 망가뜨리기도 하는 것 같아.
목적지가 어차피 없다면, 가장 쉽게 항해하는 방법은 배를 모는게 아니라
바다를 타고 흘러가는게 아닐까?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16.
육지다.

한달간 항해일지를 쓰지 않았어. 쓸 말이 없더군.
바다가 날 이리로 데리고 왔어.
내가 멋대로 기대하고 흠모하고 욕했던 그 친구를 찾아서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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