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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Feb 19. 2017

실존주의 심리치료

인간의 본질적 고뇌가 문제의 근원이다

심리치료의 기법을 다루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불안,절망,슬픔,고독 등 실존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고뇌를 다루는 것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정신적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실존치료라 한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이 가진 실존적 고뇌에 의해 내담자의 정신적 문제들이 야기되었다고 보고, 그로 하여금 인생에서의 의미와 가치를 찾도록 돕는 방향으로 치료를 전개한다.
 
실존치료에서 다루는 네 가지의 중요한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는, 죽음death, 자유freedom, 소외isolation, 무의미meaninglessness 이다.


심오하고 불명확한 느낌을 주는 단어들이다. 실존치료에서는 이 네가지의 키워드가 인간의 궁극적이고도 본질적인 관심사로 본다.
 



 
죽음death
"피할 수 없는 '나'의 결말이기에, 살고픈 소망 사이에서 갈등하다."
 
나는 지금 여기 존재하며, 숨 쉬고, 생각하고, 먹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명확히 살아나가고 있지만, 나는 언젠가 지금 여기를 인식할 수 없는 '사라진 존재'가 될 것이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나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며, 영원할 수도 없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나의 결말이다.
 
죽음에 대한 지각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삶에의 강력한 소망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기도 하다. 이 사이에서 존재는 갈등을 겪게 되고 살고자 하는 열망은 다르게 표출되어 신경증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핵심적인 존재론적 갈등이다.
 
어빈 얄롬의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에서 다루는 여러 상담 사례에는, '죽음'에 대한 실존적 문제로 인해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시한부 암 선고를 받고 있는 남자, 남편의 죽음을,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미망인과 엄마, 은퇴(단편적으로는, 한 직업의 죽음)에 빗댄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성性에 투사하여 극복하려는 남자 등, 생각보다 많은 사례가 실존적 접근으로 인하여 해소가 되는 모습을 보고 난 전율을 느꼈다.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고뇌이고 이는 필연적인 갈등상황을 유발한다.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생에서,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가꾸는 것은 유한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자유freedom
"내 존재 자체가 근거없이 던져졌음에, 내 존재의 근거 찾기를 소망한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한다. 인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큰 동력이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열망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제한과 억압'에서 벗어나고 나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미의 자유에 가깝다.
 
실존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자유롭게' 이 세상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어딘가에 매여있지 않다. 한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건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전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내가 현재 있는 것도, 내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후에 어디로 간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근거도 없어서 얽매일 것 없이 존재 자체가 자유롭다. 이런 실존적 자유, 존재의 '근거없음'이 역으로 나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소망을 강화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갖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존적 고민을 간편하게(?)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믿기만 하면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 받기를 바란다. 이것 역시 내 존재의 근거와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기 위함이다. 나 혼자서는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기에, 타인이라는 거울을 필요로 하고, 그런 관계 속에서 '너무 자유로이 던져진 나의 존재로서의 근거'를 확인받고자 한다.




 
소외isolation
"나는 결국 혼자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고 싶기에 접촉을 갈구한다."
  
인간은 그 누구와 아무리 친밀하게 맺어진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연결될 수 없는 간격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도 네가 될 수 없고, 너 역시 어떻게 해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가까운 부모자식, 배우자, 소울메이트라 하더라도 나는 너처럼 느낄 수 없고 너는 나처럼 사고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물리적으로 뿐 아니라 실존의 세계에서도 철저하게 서로에 대해 분리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소외다.
 
절대적 소외를 지각할 때, 우리는 접촉하고자 하는 소망을 강화하며, 어떻게 해도 그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갈등을 일으킨다. 관계 맺기 자체가 불안정한 경계선 성격장애의 경우도 이 범주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경계선 성격장애의 경우엔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어떨 때는 마치 '하나라도 된 듯이' 극적인 친밀감을 경험하다가도, 갑자기 그 관계를 무로 돌리며 심지어는 적대적으로 인식한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실존적 형체를 다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끼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관계에서 절대적 소외를 경험케 하는 아주 작은 균열만 발견해도, 크나큰 좌절감과 함께 분노의 정서를 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실존치료의 소외 부분의 키워드를 정리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책을 읽으면 재정리해야겠다)
 
한 개인이 이 실존적 소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루는지가 모든 관계맺기의 패턴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도 접촉을 갈망해 의존성을 강화하던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소외감을 다루지 못해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거리를 두는 내적 고독감을 강화하던가, 먼저 배신 당하기 전에 배신해버리던가. 깊은 연관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무의미meaninglessness 
"근거없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결국 혼자 죽어가야 한다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지?"
  
위의 세 가지 실존적 고뇌를 곱씹어보면, 인간은 절대적인 소외 상태에서 어디서, 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죽어가고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건가? 우리가 살면서 쌓는 외적, 내적 가치들이, 혼란 속에서 태어나 고독하게 살다 가야 하는 삶을, '그래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해줄 수 있을만큼 강력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가 이루어낸 업적들을 되돌아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되돌아본다.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나에게 의미있는 것, 언뜻 허무한 듯 보이는 이 삶을 빛나게 해줄 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가족을 위해 뼈빠지게 일한 중년이 어느날 문득, '난 대체 뭐지, 왜 이러고 있지, 남는게 뭐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것과 맞닿아 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내가 이러려고 태어나서 사는 것도 아닐텐데, 이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같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그들의 푸념은 근본적으로 실존적 고민들 하나하나에 대응할 수 있을만큼 울림이 깊은 것들이다.
 
 
.
 
결국 인간이 살면서 겪는 많은 갈등은 실존적 고뇌와 맞닿아 있고, 그들이 그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고 실존적 가치를 스스로의 사고와 언어로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실존치료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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