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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Jun 13. 2017

도움과 오지랖

도움이 불편한 사람들

가끔 불편한데 불편한 내색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상대가 나에게 '도움'이라는 명목으로 어떤 행위를 했는데 그게 나에겐 영 껄끄러울 때, 어떻게 반응해야하나 고민이 된다. 고맙다고 좋게 대하자니 계속 도움을 주어서 불편함이 쌓이고, 그렇다고 필요없다고 솔직히 이야기하자니 호의를 거절하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는 좋은 뜻으로 도움을 준 것인데, 상대가 영 떨떠름하거나 심지어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으면,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괘씸하거나,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소심해진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양쪽 다 자기중심적이어서 그렇다. 내가 좋으면 상대도 좋을 것, 혹은 좋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런 불협화음이 연출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관념 속에서 살기에, 타인의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내게는 도움인 것이 상대에겐 불필요한 간섭이거나, 내게는 별 것 아닌 일이 상대에겐 무척 고마운 일이 되기도 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적정선은 달라진다.

그런 주고 받음의 적정선을 대상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며 살아가는게 '관계를 맺는 일' 중 하나인데, 그 <맺음>을 즐기는 경우엔 서로 맞춰가는 것 자체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맞춰지느냐 아니냐, 즉, 내 기대대로 상대가 반응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맞춰보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즉, 상대를 알아가는 것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이에겐 달라서 겪는 사소한 문제들이 대수롭지 않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겠다는 태도가 있으면 나와 맞고 안 맞고 하는 문제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했는데','나한테 이렇게 하는거 별론데'하며 <나>가 자꾸 모든 것의 중심으로 들어오면 맞춰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관계는 주고 받음이 있어야 맺어지는데, 그게 스트레스면 잘 될 리가 없다. 물건을 주고 받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오는 정 가는 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관계 맺는 과정에서 나를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관계는 <상대를 볼 때> 맺어진다.


어디까지가 도움이고 어디부터가 오지랖인가?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나에게 도움인게 어떤 이에겐 오지랖일 수 있다. 그 경계엔 정답이 없다. 상식선에서 이 정도면 된다,싶은 범위는 있을지언정, 딱 정해진 모범 경계 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제로 어려움을 느낀다면, '대화로 푼다'거나, '배려를 해보라'거나 '먼저 웃어보여라' 같은 류의 모든 조언 이전에,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란 지침을 스스로 세울 필요가 있다. 상대에게 좋은 말을 듣고 좋은 사람이라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나온 행위는 쉽게 월권으로 이어지고 보상심리로 귀결된다. 상대가 정말 이런 것이 필요할지 어떨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내 욕심을 채우려는 조바심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도움을 주고 받는 일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그게 불편하다면, 그 상황에 아름답지 않은 무언가-자기중심적인 에고-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살펴 다듬어가면 보다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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