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마 Feb 04. 2018

배려와 기대

어디부터 어디까지 배려인가 

배려심 있다, 배려를 잘한다, 배려에 감동했다, 배려가 없다 등의 말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배려를 잘한다는 것은 뭘까? 나는 이게 공감을 잘한다는 말만큼이나 미묘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공감을 잘하는 것과 대화시 리액션이 좋고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는 것을 혼동한다. 공감 '받는' 쪽에서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수도 있는데, 대개는 자기가 듣고픈 말을 들어야 공감 받았다고 여긴다. 그건 편을 들어준 것이지 공감이 아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 버전의 상황 설명만 듣고 맞다고 맞장구 치는 것은 편을 드는 것이지 공감이 아니다. 자기애적인 시각에서 보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나에게 공감해주는 좋은 사람인양 생각되기 쉽다. 

배려도 비슷한 속성을 가진다. 나는 배려라고 하지만, 상대에게 배려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에게 어떤 것이 배려인지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행해진 배려는 때론 상대에게 폐가 되기도 한다. 보편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배려,친절에 대한 것은 역시 보편적인 상식의 기준에서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특성이 있기에 미묘한 부분에 들어가게 되면 나에게는 배려인 것이 상대에게는 배려가 아니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차츰 파악하는 등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부분이다. 

배려에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위하는 이타성이 전제로 깔리기에, 배려행동을 하는 사람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내가 상대에게 뭔가를 베푼다,준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내가 좋아서 하는 배려라 하더라도, 상대에게 '좋은 일일 것'이라는 '내 관점에서의 믿음'이 있기에 상대가 이것을 기쁘게/고맙게/좋게 받아줄 것이란 기대 또한 깔리게 된다. 쿨하게 내가 좋아서 했으니 그 다음은 받은 네가 알아서 해,라며 휙 돌아서는 이는 별로 없다.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받고 싶어한다. 관계 속에서 교류를 하며 정을 나누고자 하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마음이기도 하다. 

문제는, 내 입장에서는 상대가 좋으라고 한 일이기에 긍정적인 피드백을 기대하지만, 실제로 그 배려가 상대에게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건 썩 좋지 않을 때 일어난다. 상대가 귀찮아하거나 부담을 느끼거나, 때에 따라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배려했다고 믿는 쪽에서는 상황에 따라 실망, 미안함, 분노 등의 감정이 뒤따르게 된다. 기대가 꺾인 탓이다. 

이걸 늘 적재적소에 맞게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이것을 어려워하는 편인데, 사람마다 생각도 가진 사연도 다른데 괜히 넘겨 짚어 오버해서 과잉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무심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문제는 아니고 상대의 성향도 맞물려 돌아간다. 평소에 연락도 않고 몇 년에 한번 볼까한 지인이 자기에게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불같이 화를 내며 인연을 끊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나로서는 그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은 주위에도 잘 알리지 않을만큼 사적인 나만의 이슈로 인한 것이었고, 그 사람에게 굳이 알려야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게 자기에 대한 푸대접으로 다가왔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내 입장에서는 친한 친구가 이러면 모르겠는데 왜 이 사람이 날 상종 못할 종자 취급을 하면서까지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와 친밀한 것도 그 반대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관계 속에 있는 사람간의 각각 다른 거리감, 개인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등에 따라서 삐걱대며 아귀가 안 맞을 때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 하나하나는 책과도 같다. 표지도 속지도 종이의 색이나 활자체, 일러스트 등 생김새도 다르고,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그 책의 띠지에 있는 문구만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결국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이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고, 특정 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가늠되는 것처럼,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는가. 결국 부대끼고 겪어봐야 그 사람을 아는거고, 그에게 필요한 배려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도 감을 잡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대에 대해 그 정도로 알지도 못할 뿐더러, 배려가 가진 이타적이고 호혜적인 성질에 기대어 상대에게 내 배려가 먹혀 들어가리라 멋대로 기대하고 받아줄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 배려는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한 배려다. 내 맘 좋자고 하는 자기만족적 행위라는 뜻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맘 써주는 것이니, 호의에서 시작된 선한 의도의 행위이긴 하다. 하지만 결국 그걸 받는 상대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간의 마음만 다칠 뿐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도 그런 예가 나온다. 밥을 굶으며 구걸하고 있어 아사 직전인 자에게 음식을 준 중산자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어딘가에서 장정이 나타나 그를 구한다. 그리고 예를 올리며 '당신이 죽기 직전인 나의 아버지를 살렸기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정작 음식을 준 이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받은 쪽에게는 너무나도 필요하고 또 원하는 것이었기에 큰 배려로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밥 한덩이에 목숨을 구한 셈이 되었다. 진짜 배려는 내가 아니라 상대로 인해 결정된다. 호의는 남지만 배려가 성립하려면 상대의 필요 또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듯하면서도 쉽지가 않다. 

상대를 겪으며 때로는 삐끗하기도 하면서 맞춰가는 것이겠지만, 그 과정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배움으로 남긴다 하더라도 여기에 내 욕심을 넣고 멋대로 기대하는 것만큼은 제외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유는, 나의 마음에도 상대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 18화 도움과 오지랖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