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다른 채널로 새상을 보고 있다.
에스토니아 출신 생리학자 야곱 폰 웩스쿨은 1957년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에서 동물이 경험하는 주변 세계를 '움벨트(Umwelt)'라는 용어로 지칭하였다.
개미, 벌, 두더지, 거미, 강아지, 고양이 등 모든 생물은 세상을 인식하는 저마다의 방법을 갖고 있다. 개미 세계에서 활짝 핀 꽃은 인식되지도 않을 뿐더러, 지나가는 길목에 있을 때 넘어가거나 피해가야 하는 장애물 정도로 여겨진다. 꽃의 모양이나 핀 정도는 개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개미에겐, 꽃의 일부 특성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벌은 꽃의 모양과 핀 정도를 구분하여 인식한다. 꿀을 따는 것이 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꽃에 대한 벌의 인지는 개미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개미와 벌은 같은 공간, 환경에 놓여 있지만 인지하는 것이 다르기에, 그들이 느끼는 세상 또한 전혀 다르다. 이 각각의 세계는 각 종(개미와 벌)에게만 의미있게 펼쳐진 세계이자 장(field)으로, 움벨트라 불린다.
이같은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서 나온 책이 <떡갈나무 바라보기>이다. 이 책은 각종 생물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설명함으로써, 세상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환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떡갈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딱따구리와 밑둥에 땅굴을 파고 사는 두더지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과 다름없다.
이종간의 움벨트(개체가 주관적인 자기 입장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지하는 세계)는 서로 극명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동종간에서는 어떨까? 같은 종이니,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한때 보는 이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는 드레스 사진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처럼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하여,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가정 자체도 의심스럽다. 보는 관점에 따라 실제로 감각 또한 변하고, 물리적 현실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은, 플라시보 효과(위약효과, 좋은 약이라는 믿음을 갖고 먹은 비타민제가 병에 효과를 나타냄)등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물리적 현실조차 그럴진대, 관념적 현실은 오죽하겠나 싶다.
개개인에게 저마다의 움벨트가 있다고 상상해본다. 각자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각자의 시각에서 본 것들에 대해 약속된 정의인 '언어'를 사용해서 얼추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을 뿐,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걸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보다 첨예한 외로움을 많이 느낄 것이다.
각자의 움벨트가 교차하면서, 마치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 통한다느니, 공감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기뻐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만큼의 각자의 움벨트가, 주관적인 세계가, 소우주가, 경계의 물방울이 있다고 상상해본다. 그것들이 서로 무지개빛의 영롱한 간섭효과를 표면에 이지러지듯 내비치며 부대끼고 섞이고 분리되는 모습을 본다. 그나마 비슷하게 느껴지는 움벨트를 가진 이들이 그룹을 형성하고, 다수가, 대다수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우리가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므로 옳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그저 다수의 주장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적 소수자의 움벨트는 성적다수자의 그것과 매우 다르므로 비정상인양 여겨진다. 정신분열증을 겪는 이들의 움벨트는 대다수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고 도저히 섞일 수 없기에 병으로 구분하여 치료대상으로 본다. 사이코패스의 움벨트 역시 다른 종이라 생각될만큼 생소하고 낯설 것이다.
다수와 다른 움벨트들 중 어느 정도로 다르고, 어느 정도로 공익을 해치느냐를 기준 삼아 특이함,비정상, 범죄, 정신질환 등이 나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면서 기준 또한 조금씩 바뀌어 동성애는 그저 다르고 소수일 뿐인 움벨트로 인정을 받는 추세이고, 4차원, 똘끼, 예술가의 광기 등으로 일부 독특한 방향을 향한 움벨트는 창의적인 무언가의 범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쩌면 인간 의식의 발전은 다양한 움벨트들을 발견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나만의 세상과 기준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유아적이다. 다수의 기준만을 따르는 것 역시 경직된 삶과 진짜 내가 없는 삶을 야기한다. 타인의 움벨트가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존중할 수 있는 이들은 타인을 내 입맛에 맞추려 하지도, 타인의 기준에 날 맞추려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할 뿐이다. 이것은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인간이라 느껴지는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기도 하다.
상대의 감정이나 반응을 내 것인양 내 입맛에 맞기를 기대하는 이들은 그만큼 진하게 타인과 얽히고 섥혀 감정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다. 상대와 나의 본질적 거리를 알고 있는 이들은 존중과 거리두기에 능하기에 큰 얽힘이 적지만 그만큼 다채로운 감정의 섞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얽힘을 얼마나 허용하고,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얼마나 조정하느냐에 따라, 전자와 후자 사이의 어딘가에 머무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얽힘의 과정이나, 각자의 움벨트 자체를 인식하는 정도나, 기대치를 설정하는 정도 등에서 균형을 잃게 되면 인간관계의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움벨트를 과하게 인지해서 외로움을 느끼는 타입인데, 이 또한 바람직하지는 않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보고 있나?
아니다.
그렇기에 나같이 보길 바래서는 안된다. 상대에게 '나와 같기'를 요구하며 나같지 않음에 화를 내는 정도가 심하면, 성격장애에 가까워진다. 상대와 나의 움벨트의 경계를 섞는 방법에 혼란을 겪으면, 격하게 당장 하나가 된 듯 친밀감을 보이다가, 다른 세계임을 발견하고 극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경계선 성격장애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다.
나와 세상 사이에서의 균형잡기, 나의 세상과 타인의 세상 사이에서의 균형잡기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균형잡기를 위해 소통이 필요하며, 소통을 할 때엔 내 움벨트의 용어를 이해시키는 방법을 써야지, 상대의 움벨트를 파괴하거나 무시하는 방법을 사용해선 안된다.
이 방식에 충실한 대화법이 비폭력대화이고, 비폭력대화는 I(나) message를 근간으로 하여 상황에 대한 내 감정을 전달하고 상대의 감정을 읽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내 움벨트에선 사과가 어떻게 보여서 내 맘이 어땠다, 네 움벨트에선 이렇게 보였겠구나 하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대화법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상대의 움벨트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폭력적 대화를 시도한다. 나도 포함해서.
아내 : 당신 또 늦었어? 대체 허구헌날 왜 그렇게 술이야?
남편 : 넌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술을 마시고 퇴근시간보다 세시간 늦게 귀가한 상황은 둘에겐 공통으로 존재하는 사과apple이지만, 아내의 움벨트에선 책망거리로 읽힌다. 그리고 서운한 일이다. 아내는 자신이 그로 인해 서운하고 걱정된다고 말하는 것 대신에 책망하며 남편의 움벨트를 공격했다. 남편의 움벨트에서 이 사과는, 고단한 직장생활의 상징이다. 만일 아내가 '당신이 술 마시고 늦게 와서 서운하고 걱정도 되는데, 싫어도 술자리를 해야하는 당신이 딱하기도 하고 우리 가정을 위해 고생한다 싶어 맘이 짠해. '라는 말로, 남편의 움벨트 속 사과인 '고단함'을 읽어주고 지지했다면, 결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에겐 나름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 있고, 그 수만큼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움벨트들이 있다. 움벨트의 경계를 허물거나 내 것인양 만들거나 완전히 공유할 순 없지만, 정제된 언어로 나의 움벨트 속 사건과 감정을 묘사함으로써 서로간의 움벨트가 '이해'될 수는 있다.
몇마디 말과 판단만을 가지고 '공감하고 다 이해하는양' 여기는 것에서 소통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착각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소통과 교감이 시작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