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중심성 벗어나기 게임 중인 엄마
일년 남짓한 나홀로 육아 기간을 지나보니, 왜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도 자란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해보지 않은 경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건 성장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육아는 분명 색다른 면이 있다.
부모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를 위해, 부모는(이 사회에서는 주로 엄마지만) 물심양면으로 노력하고 공부한다. 뭘하면 아기가 좀 더 편하고 건강할지 생각하고, 내 입에 밥이 덜 들어가고 내 눈꺼풀이 졸음과 싸우느라 지쳐도, 아기가 편할 수 있다면 기꺼이 감내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내 욕구는 뒤로 밀리기 일쑤지만, 대부분의 엄마(부모가 함께 해야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상 그렇지 않기에 엄마로 표기한다. 주양육자의 의미로 엄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밝히며, 엄마가 육아를 전담하거나, 잘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 또한 밝힌다)는 이를 기쁘게 혹은 힘들더라도 기특하게 참아내며 아기의 욕구를 최우선으로 한다.
나보다 타인을 우선시하여 배려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최고의 덕목이다. 하지만 보통 상태의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라 이런 이타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엄마는 내가 아닌 개체(타인)인 아기를 향해 그런 이타성을 발휘하고, 이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이 된다.
엄마의 뇌는 소위 모성 홀몬이라 부르는 옥시토신에 젖어 있어 아기를 대상으로 이타성을 백분 발휘한다. 심지어 엄마의 뇌는 아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기를 떠올릴 때 반응하는 뇌부위가 자기를 생각할 때의 부위와 같다는 뇌연구 결과가 있다) 자기중심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신이 심어준 일종의 '착각'이자 보다 훈련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깔아준 튜토리얼 프로그램인지도 모른다. 홀몬빨+네가 나인 것 같은 뇌의 착각이 기꺼이 나를 미루고 아기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셈이다.
본래 튜토리얼은, 쉬운 난이도로 짜여진 연습모드다. 옥시토신과 뇌의 착각 등은 엄마로 하여금 '비교적 쉽게' 이타성을 발휘하여 아기를 돌보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본게임에 들어서며 난이도가 높아진다. 홀몬의 영향은 적어지고, 엄마의 욕구가 스물스물 커지며 '힘들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같은 게임을 해도 어떤 이는 잘 하지만 어떤 이는 연습게임도 어려워하듯이, 사람마다 힘들다고 느끼는 시기나 정도는 다르다. (물론 매우 까다로운 아기처럼, 튜토리얼 자체의 난이도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또는 애초에 이 게임과 너무도 안 맞아 육아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을테고.)
이제 슬슬 '개인인 나'의 욕구에 눈길이 가기 시작한다. 두번째 고비다. 자기중심성으로 돌아온 나는 선택의 순간 고민하게 된다.
잠깐은 괜찮을거야.
나도 숨 좀 쉬어야지.
엄마가 아기를 뒤로 미루는 순간이 온다. 잠시 잠깐의, 대수롭지 않은 순간들이지만, 분명 아기를 돌보던 초기만큼 아기에 올인하지 않는 때가 온다. 그걸 '요령이 생긴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보 엄마는 조금만 아기가 울어도 큰일 나는 것같이 전전긍긍했다면, 소위 '요령이 생겨' 익숙해진 엄마는 울음이 그저 '불편하거나 원하는게 있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 '어어 그래, 배고파? 심심해?'하며 다가갈 수 있다.
여기에서 어떤 엄마들은 미묘한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 늘 즉각 반응해야할 것 같은데 맘이 안 따라주고 힘들게 여기니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 없다! 나도 처음엔 '느슨해진 나'를 보며 온갖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 또한 튜토리얼의 일부다. 아기 입장에선 마법처럼 모든 것이 착착 대령되다가, 엄마가 조금씩 '늦게 등장하면서', 자기 욕구가 바로 충족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럴 때 아기는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 표현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기다려야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어떻게 울면 좀 더 효과적이라는 것도 배우기 시작한다. 즉,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소통법'을 익히게 된다.
내 경우엔, 옥시토신의 은혜(?)를 입고 아기에게 온통 정신이 집중된 시기에 일종의 감동을 느꼈다. 나란 사람이 이렇게 몸 축나고 힘든 것도 잊을 정도로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니, 스스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엄마가 되면 다 그리 한다곤 해도, '내가 그럴 수 있을까?'하고 의심했던게 사실이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날 엄마로 만들어준 아기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볼 때마다 뭉클해지기도 했다.
동시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내 욕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상태로 돌아가면서, 점점 '나를 위한 것인데 아기를 위해서 한다고 우기는 일' 이 생길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좋은 옷은 비싼 옷이 아니라, 맘껏 뒹굴고 놀아 더러워져도 엄마가 제지하지 않는 편한 옷이다. 아이에게 좋은 것은 비싼 먹거리가 아니라 엄마가 마음을 담아 만들어준 음식이다. 아이에게 좋은 것은 스스로 재미를 느껴서 하는 놀이이지 '이러이러한 효과와 목적이 있어서' 엄마 욕심 채우려고 '시키는 놀이나 학습'이 아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은 마음이 끌리는 그림책 한 권이지 권장도서 목록의 그림책을 싹 다 억지로 읽는게 아니다.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불안을 채우고 자기 만족적이고 전시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가. 그로 인해 아이들은 얼마나 정신이 멍들어갈까.
돌이 지나니 비로소 '실전'에 들어간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돌보기만 할 때가 편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점점 자기주장이 생겨서 엄마의 욕구에 정면으로 부딪혀온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옳은 것, 좋은 것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아이에게 갖다대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아이 입장이라면, 어떻게 느낄 것인지를 반대편에서 또 떠올린다. 옥시토신 뽕빨(!)도 없어졌고, 나는 성숙하고 훌륭한 어른도 아닌데, 이제 이타성을 날로 발휘하는 연습을 해야한다.
아이가 말을 하고 고집이 세지는 시기가 오면 난이도는 더 올라갈 것이다. 미운 네 살, 미친 일곱살 등등이 다 새로운 게임 필드이고 던전인 '레벨업 구간'이다. 아이를 길러내는 어른으로서, 내 욕구를 얼마나 잘 처리하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 눈높이에 맞게 공감과 훈육을 적절히 섞어낼 수 있는지,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가 레벨업 포인트다.
나는 이런데 너는 이렇구나.
일부러 분리하는 말을 속으로 연습해본다. 나와 너는 분리된 존재다. 비록 아이가 어려 엄마가 자기 세상의 전부인양 느끼지만, 엄마는 아이가 내 연장이고 일부인 것처럼 귀하지만, 우리는 엄연한 독립된 존재다. 말은 생각의 반영이고, 때론 말이 생각을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말이라도 그렇게 해본다.
'넌 왜 이러니?'가 아니고, '넌 이렇구나.'만도 아닌, '나는 이런데 너는 이렇구나.'를 되뇌이며 우리의 다름을 미리 연습한다.
MRI 기계에 들어가는게 무서운 어린 환자를 위해, 어떤 병원의 의료진이 기계를 해적선처럼 꾸미고 아이에게 적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누워서 숨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무사히 검사를 마쳤다는 해외의 일화가 있다. 검사는 해야하니 무서워도 참아,가 아니라, 상대 입장을 헤아려 고민하고 최선을 다해 공감적인 환경을 마련해준 의료진의 현명함에 감탄하고 또 감동했었다.
넌 무섭구나, 하지만- 이 아니라,
그러면-으로 이어져 배려하는 것.
그게 다음 스텝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건 육아의 문제를 넘어선다.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상대방에게 공감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원형처럼 녹아있다. 이 감각을 제대로 익힌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인간으로서,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 이상의 소득이 있을까. 우리가 흔히 쉽게 말하는 공감, 소통은 대개 잘 듣고 추임새 잘 넣기, 듣고 싶은 말 해주기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이걸 뛰어 넘어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수용하고 안아줄 수 있는 상태를, 꼭 경험하고 배우고 싶다.
이렇게 보면 육아는 자기성장 훈련이자, 삶의 수행이나 다름없다. 도 닦고 어려운 용어를 쓰며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수행보다 어쩌면 더 본질에 닿아 있는 수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아이는 나를 가르치고 깨치는 스승이라 부를만하다.
이번 생, 잘 배우겠습니다, 아기 스승님.
열심히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