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원영 Aug 09. 2017

아빠 육아, 삽질을 허용하자

아빠의 육아엔 시간이 더 필요하다

EBS 다큐프라임의 육아 다큐멘터리 중 유명한 시리즈가 있다. 마더쇼크, 파더쇼크 시리즈가 그것이다. 마더쇼크는 예전에 보았고, 파더쇼크는 최근에 보았다. 엄마건 아빠건, 롤모델이자 영향을 크게 받은 존재로서 자기 부모를 미러링해서 자기 아이에게 똑같이 하고 있는 모습이 나와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파더쇼크 역시,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아서 '나는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똑같이 하고 있는 괴로운 아빠들이 등장해 솔루션을 얻어가는 내용을 담았다. 누가 봐도 참 노력하고, 좋은 아빠같은 이들도 있는데, 아이와는 결국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재생하고 있더라. 참 애잔했다.

온갖 육아 컨텐츠를 보면 '엄마' 역할이 강조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아빠'의 역할도 중요하다. 단순히 여권이 신장되어서 '육아가 여자만의 일이냐'라는 의견이 나와서가 아니다. 핵가족 시대가 되어 아이에게 애착을 느끼게 해줄 대상 자체가 줄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옛날 대가족 시대에는 아빠가 일을 하느라 아이를 잘 못 보더라도 온전히 육아를 도맡아 하는 엄마와, 엄마가 밭일을 하거나 부엌일을 할 때 애정과 관심을 주는 조부모, 이모, 삼촌, 형제들이 많아서 아이는 지속적인 자극과 피드백에 노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이가 교류하고, 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게끔 피드백을 주는 존재는 엄마, 아빠가 전부다. 운이 좋은 경우 조부모나 다른 이가 있긴 하지만 한두어명에 불과하다. 돈을 주고 시터 서비스를 사용하는 경우엔 그 관심의 질을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아빠의 역할은 실질적으로 강조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 아빠들은 바쁜 생활 속에서도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정보도 많이 보려 하고, 나름의 노력을 하려고 한다. 안 그런 사람들도 물론 많겠지만, 전체적인 의식은 '아빠도 잘 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 시스템이 안 받쳐준다'이다. 어느 아빠가 자기 자식과 놀아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들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 클 뿐이다. 이는 부부간에도 갈등을 야기한다. 그런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참 좋은 힌트 하나를 얻었다. 바로 '아빠의 육아 삽질을 허하라'는 힌트였다.

아빠 뿐 아니라 엄마도, 육아에서는 삽질의 연속이다. 엄마가 물리적으로 더 많이 붙어 있다고 한들, '올바르고 바람직한 육아'를 하고 있느냐 하면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중요한건 아이에게 뭔가를 하고, 그 반응을 보아 시행착오를 통해 개선하며 점점 최적화된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처음부터 정답을 맞출 수도 없고, 정답이란게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이마다의 특징이 다 다른데 '이럴땐 이렇게 하세요'가 모범답안이 될 수가 있을까? 그 과정을 즐기며 아이를 발견해나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마치 점수를 받고 평가를 받기라도 하는 듯'한 불안에서 엄마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게 안되기에 늘 아이에게 미안하고, 내가 엄마로서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불안하고, 별로 도움도 안되는 주변 엄마들의 썰을 정보랍시고 좇는 것이다. 이걸 깨고 나가면, 남편이 '육아에 참여도 하지 않고 서툴다!'라고 비난하기 전에, 남편에게도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다. 어쩌면, 노력하고 있는 남편에게 '완벽하지 않다'고 화내는 모습은 심리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자기상을 가진 유형의 엄마가 자기 자신에게 화내는 모습일 수도 있다. 왜 맘처럼 안되는거야!로 화가 난다면, 그 뒤에는, '세상이 내 맘대로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관념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될 수도 있고, 안되는게 당연하고, 안되어도 괜찮다. 그러니 '삽질'도 괜찮다. 내 삽질도 당연히 괜찮다.

정말 육아나 아내의 상태에 무심한 남편이 있다면, 이건 육아의 문제를 떠나 개인 성향이나 둘의 관계부터 점검할 일이니 제쳐두고, 적어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하는 남편을 두고 있다면, 아이 아빠에게도 '시행착오를 할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누구나 새로운 경험 앞에서는 뭐든 부딪혀서 해봐야 아는 게 생기고, 시도했을 때 성공하는 성취 경험이 스스로에게 동기부여가 된다. 아이만 그런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그러한만큼, 아빠도 똑같다. 그래서 아빠가 뭔가를 시도할 때 엄마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아이 앞에서 역정을 내며 그거 아니라고, 그것도 못하냐고 면박을 줄게 아니라, 큰 잘못이나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내 조바심을 누르고 아빠가 아이에게 손내미는 것을 지켜보고 기다리고 응원할 필요가 있다. 본인이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역이란게 있다. 그 경험의 기회를 차단해버리고 '넌 왜 할 줄 모르냐'고 닥달해봤자, 사이만 나빠질 뿐이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엄마라면, 아이에게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고쳐야 할 부분이다) 그러니, 아빠에게도 육아의 삽질을 허용하고 본인이 직접 실수도, 성공도 해보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로 인해 남편이 아이에 대한 애정이 더 샘솟고, 아내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육아 참여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일종의 햇볓정책이다. 못한다고 채찍을 날릴게 아니라, 기회를 주고 잘하게끔 이끌어서 스스로 한번이라도 더 아이를 들여다보게 하는 쪽이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

나 역시 남편에게 그런 기회를 충분히 주겠다고 다짐해본다. 아이가 조금만 내 마음에 안 드는 행위를 한다고 통제하려 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듯이, 남편에게도 똑같이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아빠가 잠시 어떻게 했더니 아이가 빼액 운다? 아이가 '나 이건 불편해요'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큰일 난 것처럼 왜 애를 울리냐며 자기 자신을, 남편을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앗, 이건 너에게 그렇구나, 그럼 다른 것을 줘보마 하고 다른 시도를 하며 편한 마음을 가지면 아이도 편하게 자란다. 불안이나 조바심, 분노는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불안한 정서의 아이를 가진 부모를 보면 본인들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 부모 탓을 한다는게 아니라, 아이는 부모를 그대로 반영하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육아는 누구에게나 낯설다. 둘째부터는 여유가 좀 생긴다고 하는 것도, '경험'을 했기에 그런 것이지 부모가 특별히 더 달라져서 그런게 아니다. 낯선 시기를 거쳐야 익숙한 시기도, 응용할 수 있는 때도 온다. 낯설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황하는 내 모습도, 남편의 모습도 '당연한거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임할 일이다. 육아의 삽질을 엄마에게도, 또 다른 양육자인 아빠에게도 허용하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 시도해볼만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