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일지 002

무명

by 김어항 AHANC

어항일지 002 — "무명(日)"

내가 가장 두려운 건 이름이 없는 날이다.

달력에는 숫자가 있다. 일정표엔 회의가 있고, 타이머엔 목표가 있다. 하지만 가끔, 나는 이름 없는 하루를 맞는다. 그날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었고, 들키지 않아도 슬프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 날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어항 속 벽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쓴다.

물방울이 흐르고 손이 미끄러지면, 단어는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그 찰나에, 분명 무언가 남았었다.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있다"보다 강하다.
존재가 아닌 흔적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머문다.

오늘은 이름 없는 하루였다.

이름 없는 하루는 벽에 기대앉아 조용히 흐른다.
바람은 없고, 파도도 없고, 눈물도 없다.
하지만 어쩐지 뺨이 젖어 있다.
흘린 기억은 없지만, 묻은 기억은 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방 안에서
나는 내 마음의 어항을 바라봤다.

빛이 없으니, 물고기의 형체는 흐릿했다.
흐릿한 물고기는 어쩐지 나를 닮았다.
뭔가를 향해 헤엄치고 있는 것 같지만, 목적은 없다.
목적이 없는 유영은 그냥, 존재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나는 내 존재가 너무 말갛고, 투명해서
세상에 닿지도 못할까 봐 겁이 났다.

그런 날은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 나는 내 마음속 어항에 작은 조약돌을 하나 떨어뜨렸다.
조약돌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내가 만든 이름이다.
다른 누구도 읽지 못할 이름.
하지만 나만은 기억할 수 있는, 작고 단단한 말 하나.

"유예(猶豫)."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한다.
결정하지 못한 모든 마음을 포용하는 단어.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인간적인 틈.
내가 늘 머무는 자리.

오늘은 어항일지에 유예의 날로 기록하자.
확신도, 절망도 아닌 그 어중간한 마음에
작은 이름 하나 붙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건 아주 조용한 반항이다.

세상은 모든 것을 결정하라 말하지만,
나는 오늘도 결정하지 않음을 결정했다.

그리고 어항은 조용히, 나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