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참혹한 뎅기열~ 목사님이 우셨다
이 글은 한국국제협력단 파견 해외봉사단으로 활동했던 33년 전, 죽음을 이겨내고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활동 당시의 임지방문 등 15일 간 스리랑카 여정을 담는 글이다.
참혹한 뎅기열은 삶을 바꿔놓았다
콜롬보에서의 기억은 늘 조금은 힘겹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참혹했던 뎅기열로 인한 그 당시의 사정을 다시 정리하게 된 날, 33년이 지났는데 어디서부터 기억을 꺼내셨는지 ‘처음엔 사람을 못 알아보겠더라 ‘며, 잠시 대화를 잊지 못하고 목사님이 우셨다. 다 잊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생각도 나지 않을 수 있었었는데~~
내 삶에 뎅기열이 어떻게 힘들게 했는지 주마등처럼 지나며 복받쳐 눈물이 쏟아지고, 한참 동안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함반토타 시립병원에서 수도인 콜롬보 나와로카 병원(Nawaloka Hospital) 그때만 해도 어떤 병원보다 최신시설과 전문 의료 서비스를 갖춘 대형 의료기관으로 알려진 곳이다. 콜롬보로 후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을 찾으셨고 이후 자주 병원을 찾아 기도해 주셨다.
그 인연의 시작은 개척당시 시내의 오래된 현지교회와 예배시간을 달리해 콜롬보 거주 한인들을 위해 목회를 하셨다. 함반토타에서 콜롬보 업무차 올 때 주일을 앞뒤로 주일은 종일 교회에 머물곤 했었다. 당시 어린 두 아들(선교, 선일)과 싱할라어로 대화하며, 선일이는 아기였고, 선교는 겨우 말 배우던 때라 어찌나 귀엽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일이 늘 즐거웠다. 특히 사모님의 음식 솜씨는 그때는 물론 여전히 정말 알아주는 수준급이다.
세월이 흘러 콜롬보에서 목회는 물론 ‘강 식당’(Kang’s Kitchen, Kang’s Barbecue)이라는 상호로 창업하고, BAMer(Business As Mission)로의 삶을 21년 전부터 준비하며 여러 차례 다양한 시도를 한 사례로 유명하셨다. 코로나를 지나고 이런저런 어려운 사정을 이겨내고 지금은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다. 전체 운영은 한국에서 대학을 마친 둘째 아들이 전담하고 있는 멋진 곳이 되었다.
이후 교회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이전하고, 사진으로만 대하던 그곳엔 방문할 기회가 없다가 이번 일정에 방문할 계획에 넣었었다. 콜롬보 도착 다음날, 하필 보관 중인 번호마저도 옛 번호였는지 소통이 어려워, 옛날 기억을 더듬어 주일 예배를 위해 분주할 목사님께 SNS에 찾은 메모를 통해 가까스로 교회로 가겠다는 일방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도심에서 약 12km 떨어진 먼 곳까지 택시로 이동해 갔다. 내심 반가울 만남에 들떠 신이 났었다.
아뿔싸, 도착한 교회는 그대로인데, 그간 사진으로 만난 그 모습 그대로인데, 벌써 6~7년 전 현지 목사님께 맡기고, 처음 도심 교회에 다시 예배를 드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예배시간 시작 직전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7년 만에 SNS 몇 곳에 남겨진 교회와 목사님의 흔적을 찾아 너무 부풀어 열심히 달려갔는데…..,
마침 현지 목사님의 예배 인도가 막 시작된 상황이라 그냥 빠져나올 수 없어 어렵게 설교와 축도를 마친 뒤, 현지 목사님을 통해 저간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이 척박한 곳, 온갖 종교의 신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현지 목사님은 어떻게 씨를 받았는지, 다시 이렇게 씨를 뿌린 흔적에 감사했고, 그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헌금으로 드리고 총총히 콜롬보 시내로 돌아왔다. 돌아오던 길도 갈 때는 시내애서 잡은 택시가 수월했지만, 돌아오는 길안 어찌나 험난했는지……,
현지 랑카 목사님께 전달받은 새로운 번호로 연락했지만, 주일 분주한 일정 중이라 소통이 결국 안되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다시 전화를 드렸더니 '레스토랑 소식‘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셨고, 점심을 함께하자 청해 주셔서 만사 제치고 달려가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반가운 두 분께 먼저 인사드리고 함반토타에 먼저 도착해 일주일 넘게 지내다 왔다 했더니 대뜸 '죽을 뻔했는데 또 가고 싶었느냐' 하셨다. 정성껏 차려주신 맛난 점심을 나누며 33년의 세월,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듬성듬성 서로의 사정을 전하기 시작했다. 1993년 뎅기열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당시 함반토타에서 후송된 소식을 듣고 사모님과 함께 병원으로 찾아와 어렵사리 면회를 허락받았으나, 이미 '병세가 심해 몸이 이미 많이 부었고, 특히 배가 너무 부어 처음엔 알아볼 수 없었다'며 눈시울을 적셔 이내 같이 울어버린 것이다.
중환자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없어 허락된 잠깐씩의 특별면회 시간에도 내장 기관 손상에 의해 피가 새면서 배가 붓고 각혈을 하는 상태를 보셨고, 몇 차례 면회를 통해 기도와 위로를 끊임없이 하셨을 터지만, 사경을 헤매며 섬망증으로 아주 잠깐씩 의식이 돌아오던 때라 내겐 당시의 큰 기억이 전혀 없었고, 무의식 중에 수액을 맞으며 팔목을 침대에 묶여 몸부림했던 잠시의 기억과 중환자실 옆 침대에 함께 입원했던 7세 소녀의 사망으로 크게 실망하며 울었던 기억 등 분절해 남아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들려준 부분들이라 새삼스러웠고 아득했던 그때의 시간들, 이후 살면서 겪은 많은 어려움들이 순간순간 스쳐 지나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더해졌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후송이 결정되고 아주 조금씩 의식을 찾으며, 여권 소지가 의무였던 봉사단 규칙에 따라 여권을 잘 챙겨 왔었다. 병원에서 공항으로 이동 직전까지 링거병을 달고 은행을 들러 서울 도착 전까지 어떤 상황을 맞을지 몰라 최소한의 예금을 인출해 준비금을 마련했다. 이미 너무 부은 몸 상태로 맞는 옷이 없어 아마도 선배 단원의 옷을 얻어 입었던 듯하다. 신발도 260mm(실제는 240mm) 운동화를 누군가 사서 챙겼던지 그 큰 신을 신고 함반토타에서 들고 온 배낭의 짐을 챙겨 공항으로 떠나던 날 밤, 그 밤의 기억이 생생했다.
이동 전 소식을 듣고 온 동기들과 몇몇 선배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리랑카 출발은 밤 12시 전후라, 1993년 12월 어느 밤, 그날도 캐세이퍼시픽 항공편을 통해 방콕과 싱가포르를 경유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뎅기열이 남긴 흔적은 또 다음으로 이어야 할 것이다.
어쩌다 나는 그런 병에 걸렸는지? 풍토병 중 말라리아도 무서운 병이지만, 말라리아는 예방약과 치료제가 있는 반면, 뎅기열은 아직 치료제가 없다고 한다. 목사님도 몇 년 전 뎅기열로 크게 앓으셨고, 3킬로 정도 체중이 빠졌지만 바로 뎅기열임을 인지하고 병원에서 조치를 취한 덕분에 치료가 어렵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뎅기열에 대해 일반적인 내용까지 추가로 설명해 주셨다. 뎅기열의 주된 증상은 고열과 심한 두통, 특히 안구 통증이라 알려 주셨다. 이제야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당시 왜 그렇게 눈알이 빠지는 듯한 통증이 심했던지, 통증으로 인해 눈을 뜰 수가 없어 입원 전에도 무언가를 더듬거리며 찾았던 기억이 났다. 또한 근육 및 관절 통증도 심한 증상 중 하나라고 하셨다.
나는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사람인가. 잠시 정신을 놓아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된 사연까지, 뎅기열 이후를 다음으로 이어보자.
그때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2021년경부터 ‘웰다잉을 위한 웰빙의 삶’을 공부하고 나누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목사님도 감사한 일이라며 응원해 주셨다.
무엇보다 목사님의 앞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일들과 비전을 공유해 주셔서, 어찌 되었든 또 무슨 일이든 응원할 일이 생길 것 같다. 고맙고 감사한 인연들. 세상은 참, 살 맛 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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